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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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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안리96)


조선후기 수원부 광덕면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안동, 학진리, 소외리 일부를 통합하여 진위군 현덕면 대안리가 됐다. 자연마을은 마안산을 중심으로 작은박골(1리), 사랑현과 뱀골, 의경재(2리), 큰박골(3리), 구진개(4리)로 형성됐다. 대안리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안동에서 유래됐다. 마을규모는 작은박골 35호, 사랑현·의경재·뱀골이 40 호, 큰박골이 20호, 구진개가 60호 내외다.


‘박골’이라는 지명에 대한 유래는 여러 가지지만 함양박씨들이 마을을 개척하여 ‘박골’이 라고 했던 것을, 큰박골과 작은박골로 분동分洞되었다는 주장이 가장 신빙성 있다. 대안2리에는 자연마을이 많다. 광덕분교 옆의 의경제는 달성서씨가 많고, 뱅골은 평산신씨, 송산들과 산짓말도 신씨와 서씨가 거주한다. 대안2리는 한국전쟁 전까지 의경제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래서 어업을 하는 주민들도 있었고, 경기만의 옹진과 덕적도에서 굴배, 새우젓배, 소금배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뒤 간척사업으로 경작지가 늘었고,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간척지가 확대되고 농업용수가 풍부해지면서 생활 환경이 향상됐다.


대안4리 구진개는 아산만 어업의 대표적인 어항이었다. 마을 이름도 ‘갈매기 나루’라는 뜻의 ‘구진’ 또는 기러기나루라는 뜻의 ‘홍진鴻津’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른 봄이면 하얀 돛을 단 어선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어부들이 잡는 고기는 숭어, 강다리, 병어 등이었다. 구진마을에는 성공회 구진교회가 있다. 구진교회는 1936년에 한옥양식으로 건축된 교회당 건물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어업과 농업이 공존하였던 반농반어의 마을이다보니 당제와 풍어제를 함께 지내는 것도 구진개만의 특징이다. 구진개 주변의 갯벌은 일제강점기부터 간척되다가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완성됐다. 어업에 의존하던 마을이 농촌마을로 탈바꿈한 것도 이 때였다.



바닷가 마을이었던 대안2리 의경재(2013)

| 바닷가 마을이었던 대안2리 의경재(2013) |



송산들과 아산만의 대표 어항 구진개(2012)

| 송산들과 아산만의 대표 어항 구진개(2012) |



주석

96) 진성윤(74세), 2004년 7월 작은박골 입구에서 인터뷰
신남철(80세), 신건철(75세), 신동홍(75세), 신광순(67세), 2013년 3월 대안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
한경선(58세, 이장), 한철우(63세), 2005년 7월 대안4리 마을회관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