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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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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산리97)


조선후기 수원부 가사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기산, 수산, 천곡을 통합하여 진위군 현덕면 기산리라고 했다. 자연마을은 천곡(샘골, 1리), 수산(물미, 2리), 원기산(3리)으로 형성됐다. 기산岐山이라는 지명은 기산3리 원기산에서 왔다.


기산1리 ‘천곡’은 본래 ‘샘골’이라고 불렸다. 지금도 일반적으로는 샘골, 기산리의 샘골이라는 뜻으로 기천곡이라고 부른다. 기천곡은 아랫샘골이다(윗샘골은 도대리). 아랫샘골의 다른 이름은 푸세미다. 푸세미는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일부가 도대리로 넘어갔지만 대체로 기산리에 속해 있다. 샘골에는 일제강점기만 해도 현덕면사무소가 있었다. 해방 후 교통이 편리한 인광리로 옮겨가면서 낙후된 시골마을이 되었다.


기산2리는 ‘수산’이다. 수산은 우리말로 ‘물미’다. 물미라는 지명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입구에는 가사초등학교가 있고 건너편에는 옥녀봉이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주변의 마을은 가사라고 부르고 옥녀봉 아래는 물미라고 한다. 가사는 옛 수원군 가사면의 면소재지였다. 물미마을은 곡부공씨가 많다. 해방 전에는 동족마을이었다고 한다.


기산3리는 ‘원기산’이다. 원기산은 남쪽으로 안성천 하류(평택호)가 바라보이고 큰 길에서 깊숙이 들어가서 ‘피난곶’이라고 불렸다. 마을규모는 약 50호다. 마을 남서쪽의 기산들은 일제강점기 전후에 간척됐다. 경작지는 간척 진행과정에서 확대됐다.


기산2리 옥녀봉은 기산리의 주산이다. 옥녀봉에서는 1919년 3월 9일 평택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기산리 만세운동은 권관리, 기산리 일대의 천도교인들이 주도했다. 이 운동을 기점으로 평택, 진위를 비롯한 평택지역 전체에서 만세운동의 불길이 일어났다.



기산2리 물미 옥녀봉(2012)

| 기산2리 물미 옥녀봉(2012) |



기산3리 원기산과 기산들(2012)

| 기산3리 원기산과 기산들(2012) |



주석

97) 백성기(75세), 2005년 7월 기산3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