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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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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도대리101)


대한제국시기 수원군 현암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천곡리, 문곡리 일부를 통합하여 진위군 현덕면 도대리라고 했다. ‘도대리’라는 지명은 지형이 돛대와 같다고 하여 ‘돛대’, ‘되떼’라고 불렀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도대리의 자연마을은 천곡(샘골, 1리), 원도대(돛대, 2리), 문곡(글괭이, 3리)이다. 마을규모는 샘골이 15호, 원도대가 60여 호, 글괭이가 10여 호다. 도대1리의 자연지명은 천곡이다. 천곡은 자연지명으로 샘골로 불렀다. 샘골은 윗샘골과 아랫샘골이 있는데 도대1리의 것은 윗샘골이다. 그래서 도천곡이라고도 부른다.


도대2리 원도대는 밀양박씨가 먼저 입향해 개척했고 300여 년 전 상주황씨가 입향하면서 규모가 확대됐다. 이 마을은 지형이 돛대를 닮았다고 하여 ‘됫대’ 또는 ‘돛대’로 불렀다. 실제로 마을 앞에는 돛대를 뜻하는 오래된 엄나무가 자랐고 중앙에는 큰 바위가 놓여 있어 주민들은 이를 신성하게 여긴다.


도대리의 생업은 농업이다. 근대 이전 도대리는 논보다 밭이 많았다. 경작지는 안성천 하류를 향해 배 모양으로 길게 뻗은 구릉지대에 형성되었다. 근대 전후 도대천 좌우의 간석지가 개간되면서 경제기반이 확대됐다. 간석지의 개간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가나 권력자들이 흉년을 이용해 개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 도대리 일대에는 일본인이나 친일지주가 많았다. 소작료도 지주와 소작농이 반반씩 나눴지만 일제 말에는 공출미까지 빼앗겨 농민들은 굶주렸다. 농민들은 해방 후 적산농지 불하와 제1공화국의 농지개혁으로 자영농이 되었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현재와 같은 경제력은 1970년대 아산만방조제 준공과 경지정리사업이 가져왔다.



주석

101) 황종준(80세), 이근새(77세), 2005년 12월 도대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