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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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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방축리102)


갑오개혁 뒤 수원군 현암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방축동, 신기동, 승량동면 의 국리를 통합해 진위군 현덕면 방축리라고 했다. 방축防築은 방죽말에서 유래된 지명이 다. 자연마을은 방죽말(1리)과 국말(2리)로 나뉜다. 방죽말은 다시 새터·수사리·방죽말 로 구분되고, 국말은 윗말·아랫말·갈마지로 나뉜다.


방축1리 방죽말은 함평이씨 마을이다. 마을규모는 65호 내외다. 그래서 주민들 상호 간 의 위계질서가 뚜렷한 편이다. ‘방죽말’이라는 지명의 근거가 되는 방죽은 마을입구 머릿다리 근처에 있었는데 1960년대 초 메웠다.


방축2리 국말은 함평이씨와 청주한씨 양절공파가 대부분이다. 해방 전에는 33호였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서 29호밖에 안 남았다. 국말은 국화 국자를 지명으로 쓰고 있다. 방축2리가 국화 국자를 쓰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전설 때문이다.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군의 기세에 깜짝 놀란 인조임금은 서둘러 공주로 피난을 나섰다. 그 때 임금이 마을을 지나다가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행궁(별궁)이 있었다고 하여 궁리宮里라고 했던 것을 나중에 음이 변해 국리菊里가 되었다.’


국말로 들어가는 입구의 머릿다리는 일제강점기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골이었다. 그래서 포구가 형성되었고 배가 드나들었다. 그 뒤 간척이 진행되면서 갯골을 막아 수문을 놓았다. 밤나무로 만든 수문은 갯골의 수위를 조절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곳에 나무다리를 놓게 되면서 머릿다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머릿다리에는 주막과 정육점, 활터도 있었고 백중날 씨름대회도 열렸다.


방축리 일대는 논농사 지대다. 논밭의 비율은 2대 1쯤 된다. 경작지는 일부 문전옥답을 제외하고는 소출이 적었다. 농업용수를 얻기 위해 주민들은 머릿다리에 논방죽을 쌓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금비(비료)가 공급되었지만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농민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난한 농민들의 눈물을 닦아준 것은 농지개혁과 제3공화국 시기 아산만방조제 건설이었다.



주석

102) 조남희(82세), 김진규(77세), 이민경(78세), 2006년 8월 방축1리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