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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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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정동西井洞106)


서정동은 1981년 행정구역 조정을 하면서 법정동은 중앙동에 두고 행정동 명칭만 남았다. 법정동으로 서정동은 서정역과 서두물 일대의 마을이다. 서정동(리)이라는 지명은 서두물에서 왔다. 서두물은 1789년 호구총수가 작성될 때와 1899년 『양성군읍지』에는 보이지 않고 1911년 조선지지자료에 나타난다. 1914년 지장리·서정리·갈평리·송장면 대속동(대추동)을 통합해 서정리라고 했다.


서두물은 서정리초등학교 후문 주변의 마을이다. 1960년대 서두물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국도 1호선 옆으로 커다란 밭이 있었으며 소로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야 마을이 나왔다. 마을규모는 120호 내외였다. 도시가 확장되고 토지가격이 상승하자 토지를 방매하고 떠난 사람이 많다. 신선(신설)마을은 조선후기에 형성됐다고 전한다. 1914년 당시에는 신리新里라고 표기돼 있어 신선新鮮보다는 신설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신서新西마을은 경부선 서정리역이 설치된 후 역 주변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 상가·시장·식당이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개통은 서정동에 큰 변화를 주었다. 역로驛路와 보로步路 중심이던 육로교통이 철도와 도로 중심으로 변화되기 시작했고 나루에는 다리가 놓였다. 서정리역은 평택 서북부지역 교통의 중심이었다. 역을 중심으로 장당동 너부내·장당(노루댕이)·뱃터를 지나온 국도 1호선이 철도역 앞을 지났고, 시장·학교·종교시설·사회단체·신문사지국도 역 주변에 자리 잡았다. 1932년 역사驛舍가 새로 지어졌다. 역사驛舍는 2004년 현대식 건물로 거듭났다. 서정리역 일대가 교통·행정·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하면서 시장기능도 활성화됐다. 2일과 7일에 열리는 5일장이던 서정리장은 1977년 소도시가꾸기 사업으로 상설시장이 되었다. 1980년대 초에는 여러 갈래로 흐르던 서정천 지류들이 복개되고 철도역 동쪽에 도로가 신설되면서 쌍방향 일방통행로가 만들어졌다. 초가집과 슬레이트집뿐이었던 도로 좌우에 2∼3층짜리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초부터다. 근래에는 시장에 아케이드공사가 진행돼 비오는 날에도 걱정 없이 장사를 할 수 있게 됐다.


번성은 중앙동 지역과 장당동 지역이 나눠지는 파고다택시 사거리와 효명고등학교 후문 뒤 건너편 철길에서 서정천 냇가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번성蕃城은 ‘번성’이라는 성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됐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없고 하천부지 개간과 함께 인위적으로 붙인 지명으로 보인다. 본래 20여 호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한국전쟁 뒤부터 충청도 지역의 농민들이 정착하면서 지금은 100호가 넘는다. 갈평葛平은 갈평고가도로 서쪽너머 마을이다. 갈평은 ‘갈대가 많은 평야지대’에서 유래됐다. 100여 년 전까지 만해도 갈평들은 갈대가 무성한 하천부지였다. 마을은 하천부지를 개간하면서 확대됐다.


갈평은 200호가 넘는 큰 마을이다. 마을이 크다보니 앞갈평 뒷갈평으로 구분하고, 또 앞갈평은 윗뜸과 아랫뜸으로 나눈다. 뒷갈평은 1970년대 취락지구 개선마을로 형성됐다. 이후 주택들이 계속 들어서면서 마을 규모가 커졌다. 두 마을은 풍양조씨가 대성大姓이고 이천서씨가 일부 거주했다. 현재 주민들은 일부는 농업에 종사하지만 상당수는 공장에 다닌다. 상업인구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이충동二忠洞은 1911년 편찬된 『조선지지자료』에 처음 등장한다. ‘이충二忠’이라는 지명은 두 명의 충신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두 명의 충신이란 조광조와 오달제다. 1843년 편찬된 『진위현읍지』(1873)에 ‘조광조는 송장면(현 이충동)에 가문의 장토庄土가 있어서 이곳에서 살았는데 지금도 옛 터가 남아 있고 선조들의 묘역도 있다’107)고 기록했고, 1891년 편찬된 읍지邑誌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병자호란의 삼학사 중 한 분인 오달제는 오좌동 수성 최씨가문이 외가이고 상속받은 땅과 집이 반지산 아래에 있었다. 1800년 진위유림에서는 두분의 유허에 비108)를 세워 충신의 뜻을 기렸고 이후 두 충신의 유허가 있던 마을 이름을‘이충동’이라고 했다.


이충동에는 원이충·동령·석정·신리·광말과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이충 마을은 고려시대 송장부곡과 조선시대 진위현 송장면의 중심마을이다. 호구총수(1789)에도 송장면에는 동령마을에 77호 210명이 거주했다. 1960년대 전후에는 60호쯤으로 줄었고, 현재는 도로건설 등으로 일부가 떠나 55호(공동주택 제외)가 거주하고 있다. 공동체 제의로 정제와 줄다리기가 유명하지만 음력 정월 대보름에 서낭당 언덕과 성재고개 위에서 했던 망월행사도 유명했다. 이충동은 방용현·방돌근으로 이어지는 경기시나위 동령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을의 역사는 송장부곡의 역사만큼이나 가늠할 수 없다. 송장부곡은 고려 초에 등장하지만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동령마을은 농업이 중심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토지 대부분을 장안동의 윤참사(참사는 일제강점기 관직)·이익래·이용손이 소유했다. 일제 말 동령·서두물·칠괴동 사람들은 면화재배를 많이 했다. 면화는 1년에 두 번 수확했는데 수확한 면화를 지게에 지고 평택장까지 나가서 팔았다.


원이충은 건영·미주·부영아파트 터에 있었던 마을이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허가 있던 마을로 약 20호 내외의 규모였다. 마을은 1990년대 초, 중반 택지개발공사가 시작되면서 폐동됐다.


석정은 자연지명으로 ‘돌우물’이다. 석정마을에는 칠원의 옥관자정·신장동 제역마을의 박우물과 함께 송탄지역의 3대 우물이었던 ‘돌우물’이 있었다. 신리와 광말은 송탄고등학교 서남쪽 메디웰병원 일대에 자리 잡은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조선지지자료』와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도 나오기 때문에 대략 15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두 마을은 2005년 이후 공동주택과 이충고등학교, 각종 상가와 식당이 들어서면서 폐동됐고 원주민들은 흩어졌다.



경부선 개통과 함께 설치된 서정리역(2010)

| 경부선 개통과 함께 설치된 서정리역(2010) |



서정동의 기원이 된 서두물 일대(2010)

| 서정동의 기원이 된 서두물 일대(2010) |



이충동의 옛 중심 동령마을(2008)

| 이충동의 옛 중심 동령마을(2008) |



주석

106) 박희복(84세), 2010년 2월 동령마을 자택에서 인터뷰
107) 1843년 『진위현 읍지』
108) 조광조, 오달제 유허비는 현재 이충동 추담로 옆 충의각 안에 옮겨져 있다. 비(碑)의 건립에 대해서는 온양행궁으로 행차하던 임금이 명을 내려 세웠다는 설, 진위유림이 처음에는 오달제의 비만 세우려 하다가 조광조의 유허도 근처에 있으니 함께 세우자고 해서 건립했다는 설이 있다. 비(碑)는 조선지지자료가 편찬된 1911년에도 ‘오학사비’로 불렸고 비문에도 ‘오학사 충렬지비’라고 새겼다는 것으로 미루어 오달제의 유허비만 세웠던것을 나중에 조광조를 추배하기 위해 다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