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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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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복동通伏洞


통복동은 땡땡거리(통복지하도)를 지나 안중으로 가는 국도 38호선 서북쪽(현 삼성아파트 일대) 마을이다. 아산만의 바닷물이 드나들던 곳으로 ‘통복개’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진위현 병파면의 ‘통복’과 성남면의 ‘하통복’이 있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복리가 됐으며 한국전쟁 이후 통복개는 통복4·5리, 높은들은 통복6리, 화촌과 신덕리는 통복7리로 개편됐다. 1986년 평택시 승격 뒤에는 서부동에 편제돼 통복개가 11·12통, 하통복은 13·14통, 높은들은 15통, 화촌과 신덕리는 16통이 됐다.


통복동은 본래 땡땡거리(통복지하도)와 옛 안중으로 나가는 국도 38호선 서북쪽 일대, 그리고 신덕리와 화촌만을 의미했다. 한국전쟁 뒤 삼거리(시장로터리) 일대로 평택장이 이전하면서 통복시장과 옛 우시장 일대까지 확장됐고 나중에 평택제일감리교회 일대와 낙촌이 도시화되면서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본래 갯가에 위치해 통복개,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하천을 막았기 때문에 ‘통복보’로 불렸다. 높은들(고평)은 평택역 설치 이후 형성된 마을이다. 신덕포는 배가 드나들던 포구마을이고, 그 옆에 창너머(창월)라는 작은 마을도 있었다. 화촌은 아산만 일대의 상선과 고깃배들이 드나들던 포구로 훼나무(회화나무, 회나무로도 부른다)가 무성해 유래됐다. 한때는 장터도 있었다고 하며 주변 마을에서 해산물을 구입해가기도 했다. 땡땡거리 부근에는 마차로 화물을 운송하는 마방馬房이 많았다. 마방들은 해방 후에도 대한통운의 화물을 실어 날랐다. 마방은 1950∼60년대에도 남아있었다. 큰 변화가 없던 통복동은 1993년 5월 삼성아파트가 입주하고, 원평동사무소와 원평청소년문화의 집이 자리를 잡고, 땡땡거리에 지하도가 건설되면서 조용히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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