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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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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전동碑前洞


비전동은 평택시의 새로운 중심이다. 지금도 교통과 상업·금융·오락시설은 평택동 일대에 집중됐지만 교육기관·공공시설·공원·주거지는 비전동에 밀집돼 있다. 비전동 일대는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 지역이었다. 호구총수에는 병파면에 교리橋里·남리·비전리·통복리가 있었고 인구는 312호 1,072명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병파면에 여러 마을들이 생겨났다. 1911년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136)에 따르면 병파면에는 합정리·어인남리·비전리·서재리·통복리·삼거리·군문리·간포리·하유천·상유천과 같은 마을이 있었다. 1914년 비전동은 진위군 병파면의 어인남리·비전리·산직촌과 양성군 구룡동면의 창리(폐동됨)·서제곡(소사2동)·야미리(배미) 일부가 편제됐고 산직촌은 아직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철도역 부근에 근대도시가 발달하고, 신작로가 가설되면서 하신작과 같은 새로운 마을이 형성됐다. 1937년 평택 세무서 자리에 있었던 평택성동초등학교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작은 변화가 있었고, 삼각산 남쪽 언덕배기에도 재랭이(자란)라는 마을이 형성됐다. 또 옹기가마와 숯가마뿐이었던 삼각산 북쪽 낭떠러지 일대에도 민가 몇 호가 들어섰다.


해방 뒤 1947년 삼각산 자락에 평택중학교가 설립됐으며, 남녀 중·고등학교가 병설되면서 평택중등교육의 모태가 형성됐다. 해방 후 평택심상소학교 자리에 있었던 평택군교육청이 성동초등학교 서문 밖에 자리를 잡았다. 1981년 송탄시가 승격되고, 1986년 평택시가 승격되면서 평택기계공고 뒤에 ‘평송교육청’이 설립됐다. 평송교육청은 1995년 평택군, 송탄시, 평택시가 통합되면서 ‘평택교육청’이 됐으며 이후 ‘평택교육지원청’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1979년에 구 평택시 최초로 평택아파트가 준공됐다. 1980년대 후반 덕동산 서쪽 기슭에 준공된 비전동 주공1단지 아파트가 지어졌다. 기존의 평택-원곡 간 지방도 외에도 현 비전1동사무소에서 덕동산 북쪽을 지나 덕동초등학교 앞 매봉로를 경유하는 도로와 평택여중사거리에서 엘지덕동아파트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신설됐다. 1990년대 중반에는 은행아파트·한성아파트·신세계아파트 등 중형 민영아파트가 건설됐으며 2006년 낙촌에 우림필유아파트가 준공됐다. 2011년 주공1단지가 재개발되면서 롯데캐슬아파트가 들어섰다. 2012년 소사벌택지지구 안에 효성백년가약아파트가 분양됐고 통복천 옆에 LH아파트가 준공됐다. 2013년 소사벌택지지구 안에 비전고등학교와 자란초등학교가 개교했고 LH공사를 비롯해 많은 건설 회사들이 각종 아파트를 신축하고 있다.


비전동의 자연마을로는 재랭이(자란)·산직촌·하신작이 있다. 평택경찰서에서 평택중학교를 넘어 원곡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재랭이고개이며 고갯마루 주변에 자리 잡은 마을은 ‘재랭이’라 부른다. 삼각산은 자란산 또는 재랭이산, 당재산라고도 부른다. 삼각산정상에는 재랭이 마을의 당목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평택기계공고 뒤쪽에 일본신사가 있었다. 삼각산 아래에는 1990년대 초반부터 무속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무속인 타운이됐다.


비전1동에 속했다가 소사벌택지지구에 편입돼 2010년 전후에 폐동된 산직촌은 천혜보육원 사거리와 배다리방죽 사이에 있었던 마을이다. 규모는 20호 미만이었고 성씨도 각성바지였다. 주민들은 ‘산뒤촌’이라고 불렀지만 고문헌에는 산직촌으로 나온다. 낙촌의 본래지명은 ‘낭떠러지’다. 낭떠러지에는 평택종합고등학교(현 평택고등학교 및 평택기계공고)의 농업실습장과 옹기를 굽는 가마 두 개 그리고 유민들과 옹기가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던 민가 서너 채가 있었다. 1990년 초 택지개발로 단독주택이 들어서고 비전초등학교가 설립됐으며, 우림아파트가 준공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덕동산에서 바라본 비전1동 자란(재랭이)마을(2011)

| 덕동산에서 바라본 비전1동 자란(재랭이)마을(2011) |



주석

136) 경기문화재단, 『조선지지자료』경기편, 2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