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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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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용이동龍耳洞


용이동은 평택시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다. 자연마을로는 구룡동·현촌·신흥동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이었다. 구룡동면 영역은 구룡동마을·현촌·용두리·진사리 일대였는데 1914년 안성군에 편입돼 안성군 공도면 영역이 됐다. 1983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이웃한 소사동·죽백동·월곡동·청룡동과 함께평택시에 편입됐다.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구릉과 밭이 많고, 대부분의 구릉지대는 배밭이 조성됐다. 동쪽으로 경부고속국도가 지나가며, 고속국도를 중심으로 안성시 공도면 용두리와 경계를 이룬다. 현촌 남쪽에는 1912년 서울 냉천동에서 개교했다가 1979년 용이동으로 이전한 평택대학교(구 피어선성서신학교)가 있으며, 대학교 정문 앞을 지나가는 38번 국도를 경계로 안성시 공도읍 진사리와 행정구역이 나뉜다.


용이동의 중심은 옛 구룡동면의 소재지였던 구룡동 마을이다. 구룡동은 백운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느름골·배오개골·신선골·오른가리골·미나올골·옥골·소사물골·자바사리골 등 아홉 골짜기를 휘감아 도는데 그 형상이 아홉 마리의 용이 용트림을 하는 형국이어서 유래된 지명이다. 구룡동은 용이 푸르지오 아파트 뒤쪽에 있다. 조선후기 구룡동면에는 저수지·주막酒幕·사창司倉 주위에 진리·방축리·점막리·창리와 같은 마을들이 있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평산신씨였지만 지금은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근래 용이동은 용이푸르지오아파트 건설로 경작지가 수용되면서 진사리 앞까지 가서 농사를 짓거나 보상을 받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많다.


2012년 폐동된 현촌은 연주현씨의 동족마을이다. 그래서 마을이름도 현촌玄村이다. 현촌의 본래 이름은 달성서씨들이 많이 살아서 서촌徐村이었다. 5백여 년 전 연주현씨들이 입향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서씨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3∼4호가 거주했고 만석꾼이라고 불렸을 만큼 마을 인근의 전답과 산림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어찌된 연유로 갑자기 마을을 떠나고 연주현씨만 남았다. 마을규모는 예나 지금이나 40여 호 가량이다. 마을이 폐동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신흥마을은 용이동에서도 가장 동쪽에 있다. 신흥이라는 지명은 신대·새터·새말과 같은 의미로 새로 형성된 마을에서 유래한다. 마을은 본래 근처의 쑥밭갓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도둑이 많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만 해도 60호가 조금 넘었지만 한국전쟁 때 피란민 일부가 정착하면서 70호로 늘었고, 나중에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더 늘었다. 신흥동도 현재 재개발 예정지역이다. 파평윤씨가 대성大姓이지만, 밀양박씨와 고령박씨도 상당 수 거주한다. 파평윤씨는 200여 년 전 용이동으로 이거해 동족마을을 형성했다



택지개발로 사라진 용이동 현촌마을(2008)

| 택지개발로 사라진 용이동 현촌마을(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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