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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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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교동細橋洞143)


세교동은 1914년 이전 진위군 성남면 세교리와 은실리를 통합해 만들었기 때문에 세교동의 자연마을은 크게 잔다리(세교)와 은실로 구분된다. 잔다리는 안잔다리(윗잔다리, 윗동네)와 벌잔다리(아래잔다리, 아랫동네)로 구분됐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에 의해 잔다리 서북쪽에 신촌이 형성됐고, 통복천 변에는 일제강점기 각 지역에서 한두 집씩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다가 한국전쟁 뒤 원평동에 있던 평택장이 통복동으로 이전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커졌다.


은실144)은 큰은실·작은은실·은곡·동산아래로 형성됐다. 큰은실은 은실마을 제당 남쪽에 위치한 큰마을이다. 작은 은실은 중앙초등학교 뒤쪽에 있어 산아래라고도 불렀다. 은곡은 은실 서쪽(박가네 칼국수 주변)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 기록에 음곡·은곡으로 표기한 것에서 은실이라는 지명이 유래됐다.


1960년대 이전 안잔다리는 약 60호, 벌잔다리와 새말동네는 20호쯤 됐다. 성씨는 김해 김씨 안경공파가 대성大姓이었고, 여흥민씨, 삭녕최씨가 뒤를 이었다. 해방 전후 여흥민씨 집안의 민광식은 평택 일대를 대표하는 대지주로 땅이 세교동 일대를 비롯해 동삭동, 신대동을 지나 안중 일대까지 퍼져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후 은실마을은 50호 내외였다. 금녕김씨가 20호쯤 됐고 수원최씨가 너 댓집쯤 이었으며 나머지는 각성바지였다. 은실은 농업이 주산업이었다. 논이 전체 경작지의 80%가 넘어서 전형적인 논농사 지대였다. 은실마을은 한국전쟁 뒤 미군기지공사로 마을입구 돌산을 깨면서 경관이 크게 변했고, 산이 없어진 자리에 중앙초등학교가 이전했다. 1960∼70년대는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충청도·전라도 일대의 빈농들이 은실마을 주변에 정착했다. 광은·광운·은실·중앙연립과 같은 연립주택이 들어선 것은 1980년대부터다. 은실은 재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370여 세대가 조합을 결성했고 롯데건설이 건축을 맡았다.


신촌은 경동나비엔 길 건너편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신촌에는 ‘반또’라는 일본인 뽕나무 밭이 있었다. 한국전쟁 뒤 피란민정착촌이 건설되면서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신촌이라고 부르게 됐다.


봉학골은 세교중학교 남쪽 산기슭 마을이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구창헌(2011년, 77세)씨 한 집만 있었다. 1980년대 초 낙촌에서 옹기굽던 정석헌 씨가 택지를 조성하고 주민들을 입주시키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대부분 슬라브 주택이어서 ‘슬라브 동네’라고도 부른다. 봉학골 옆 천주교 공동묘지 남쪽에 신흥동 또는 신흥마을이 있다. 신흥동은 1974년 낙촌 개발과 관련돼 천주교 교우촌으로 조성됐다. 1990년대 초 낙촌 지역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주민들이 이주해 현재와 같은 마을이 형성됐다.


세교동은 1990년대 초 택지개발로 아파트와 자연마을이 공존하는 마을이 됐다. 세교동택지개발로 통복천 변의 새말동네와 벌잔다리가 수용됐고, 경작지의 상당부분도 사라졌다. 세교동 택지지구에 1995년 11월 우성아파트와 개나리아파트가 입주했다. 1996년 1590세대 부영1차아파트와 태영아파트가 준공됐으며, 1998년 현대향촌아파트, 2000년 11월 부도로 건축이 지연되던 보성아파트와 부영2차아파트가 입주했다.


주변지역이 개발되면서 안잔다리와 은실도 재개발을 추진 중이다. 또 천주교공동묘지가 있는 골점다리와 봉학골 인근은 토지보상과 문화재지표조사를 거쳐 조만간 택지로 개발된다. 이렇게 진행되면 조만간 세교동 전체는 녹지와 경작지, 자연마을이 사라지고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상가와 주택가로 탈바꿈할 것이다.



재개발을 눈앞에 둔 세교동 은실마을(2009)

| 재개발을 눈앞에 둔 세교동 은실마을(2009) |



주석

143) 최예봉(65세), 김종산(76세), 유병웅(65세), 최흥규(65세), 2010년 1월 28일 세교동 경로당에서 인터뷰
144) 임호형(82세, 노인회장), 목진성(77세), 2012년 1월 8일 은실마을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