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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삭동 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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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삭동東朔洞 영신永新145)


동삭동에서 세교동의 관할을 받는 마을은 영신이다. 영신은 고려시대 영신현의 읍치邑治였다. 영신현은 본래 양성현과 진위현의 일부였다가 신라 757년(경덕왕 16) 영풍현永豊縣에 편제되면서 수성군의 영현이 됐다. 고려 940년(태조 23) 영신현으로 고쳤고, 1018년 (현종 9) 수주水州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조선건국 태종 때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라고 해 수원부에 이속시켰다가, 1431년(세종 13) 진위현이 큰 길이 지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사신 접대에 많은 비용이 들지만 고을 규모가 작고 호가 적다는 이유로 통합하려다가 1433년(세종 15) 통합돼 진위현에 속하게 됐다. 조선후기 면리제面里制에 따라 진위현 여방면에 편제됐고, 1914년 서재·모산골과 함께 진위군 병남면 동삭리가 됐다. 1986년 평택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법정동으로는 평택시 동삭동에 편제되지만 행정적으로는 세교동주민센터가 관할한다.


영신은 원동삭(동삭골, 1통)·중간말(동촌, 2통)·큰말(대촌, 3통)·기루지로 형성됐다. 호는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데, 큰말이 40호, 중간말이 20호, 원동삭이 25호, 기루지가 10여 호쯤 된다. 원동삭에는 교하노씨가 많고, 중간말에는 진주소씨, 큰말에는 진주유씨가 대성大姓이다. 원동삭 교하노씨는 노동호 씨의 7대조인 노덕수가 서울 노들(노량진)에 살다가 어떤 사건에 연루돼 영신으로 이거했다고 한다. 중간말에 세거하는 진주 소씨는 남강공파다. 진주소씨는 고려 때 명문가로 경남 진주와 하동에 근거를 두었다가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로 어려움을 겪자 사패지가 있는 평택지역으로 이거했다. 진주유씨는 위로 15대부터 산소가 있다는 것으로 볼 때 약 400년 이상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삭녕최씨는 경상도 진주에서 이주해 16대 약 5백 년을 살았지만 자손이 번성하지 못해 수적으로는 열세다.



| 고려시대 영신현의 중심이었던 동삭동 영신(2013) |



주석

145) 노동호(75세), 소대영(74세), 노승훈(66세), 노대철(70세), 2009년 1월 22일 영신마을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