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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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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은 산이 낮고 평야가 발달한 지역이다. ‘평택平澤’이라는 지명도 팽성읍에서 유래됐다. 팽성읍은 삼국시대에는 하팔현이라고 불렀다. ‘물이 여덟 갈래로 흘러드는 고장’이라는 의미 다. 산으로는 부용산·성산·망해산·선말산이 있지만 모두 해발 30m 이하다. 팽성읍의 대표적인 평야인 통한들·번개들·중심들(왕십리들)·도두리들은 모두 근대전후 간척사업의 결과다. 하천은 북쪽으로는 안성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둔포천과 독천이 흐른다. 안성천은 예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였으나 이제는 둔포천이 역할을 대신한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온양행궁어로였던 충청수영로가 있었고 오늘날에는 국도 45호선이 객사리를 가로질러 아산방향으로 내려간다. 추팔1리는 조선시대 화천역이 설치됐던 역이었다. 마을 뒤편에는 마장과 우물이 있다.


‘평택’이라는 지명은 고려 건국 후에 붙여진 이름이고 별칭으로 ‘팽성’이라고도 불렀다. 고려시대에 현재의 팽성읍 노양리에 하양창이 설치돼 경양현을 설치했다. 태조 5년에는 신대리 망해산(경양산)에 봉수가 설치됐다. 망해산 봉수는 전라도 여수의 방답진에서 출발해 한양 목멱산까지 이어진 제5봉수로의 직봉이었다.


1413년(태종 13) 평택현에 현감이 파견됐으며, 경양현은 직산현에 이속돼 경양면으로 편제됐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평택현을 직산현·아산현·진천현과 함께 충청도로 옮겼다가 다시 경기도로 되돌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의 침입으로 크게 불에 타고 피해가 큰 데다 백성들도 흩어지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고을을 폐지(1596년)하고 직산현에 예속시켰다가 고을 백성들의 요청으로 1610년 복구했다. 조선후기 면리제가 실시되면서 읍내면·소고니면·동면·서면·남면·북면 등 6개 면을 설치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23부제가 실시되면서 평택군으로 바꾸어 공주부에 속하게 했다. 1896년 13도제를 실시하면서는 직산군에 속했던 경양면지역(계양)을 평택현에 통합시켰다. 1914년 수원군에 속했던 서평택지역과 함께 경기도 진위군에 통합됐으며 팽성지역은 부용면과 서면으로 분리됐다. 1934년 4월 송화1리 개화마을에 소재지를 두었던 서면(함정·대추·안정·송화·석근·두정·노성·대사·도두·신대·본정·노양·남산리)과 객사리가 중심이었던 부용면이 통합돼 팽성면이라고 했다.


1952년 일본해군시설대가 주둔했던 곳에 캠프 험프리스(K-6) 미군기지가 건설되면서 안정리에서 함정리·내리·대추리(구 대추리) 일부 또는 전부가 미군기지에 수용됐다. 미군의 주둔으로 안정리 일대는 기지촌으로 변했고 인구가 급증했다. 1972년 9월 1일 평택군 안정출장소가 설치됐으며 1979년 5월 1일 팽성면이 읍邑으로 승격됐다. 1980년 2월 평택군 안중출장소가 팽성읍 관할로 바뀌었다. 2004년부터는 용산·의정부·동두천 일대의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게 돼 팽성읍 대추리·도두2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전반대투쟁이 시작됐다. 이전반대투쟁은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2007년 끝까지 반대했던 대추리 도두2리 주민들이 노와4리 인근에 집단이주단지를 조성하고 옮겨가면서 일단락됐다.


팽성읍의 면적은 56.5㎢(전체 면적의 12.4%)로 평택시 읍면지역에서는 포승읍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인구는 2012년 6월 30일 현재 14,081세대 30,731명이며 남자는 15,417명, 여자는 15,314명으로 남녀비율이 비슷하다. 세대 당 인구수는 3명 미만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행정조직은 72개 리 284반으로 형성됐다. 팽성읍 객사리에 팽성읍사무소와 평택경찰서 팽성파출소가 나란히 있고 건너편에 팽성농협이 있다. 또 부용산 뒤쪽에는 팽성우체국·평택시립팽성도서관·KT팽성분기국·남산리에 팽성복지타운·송화리에 팽성국제교류센터·남산리에 에바다장애인종합복지관·평택예비군훈련장·안정리 농성공원 근처에 팽성청소년문화의 집이 있다.


교육기관은 1904년 남산리 강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한 근대학교와 1906년 성공회 객사리 성요한교회(현 팽성교회)에서 설립한 신명강습소가 효시다. 강난수 사랑방의 근대학교는 1913년 팽성읍 객사리에 평택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고 신명강습소도 일제강점기까지 명맥이 이어졌다. 1927년 부용면과 서면 주민들의 발의와 교육당국의 지원으로 개교한 부용초등학교가 팽성읍 객사리에 있다. 팽성읍 송화2리 입구에는 일제강점기 송화간이학교가 발전해 설립된 팽성초등학교가 있고, 팽성읍 본정리 꽃동산 기슭에는 도두리강습소가 발전해 설립된 계성초등학교가 있다. 옛 대추리 마을 대추초등학교는 2000년 폐교됐으며, 팽성읍 노와1리에 있었던 노와분교도 폐교돼 경기유아체험교육원이 됐다. 2005년 3월 송화택지지구 내에 송화초등학교가 개교했다. 팽성읍에는 5개의 초등학교 가운데 2개교가 폐교했고 1개교가 신설돼 모두 4개가 있게 됐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팽성읍 남산리의 청담중·고등학교가 유일하다. 공공체육시설로는 부용산 동북쪽에 자리 잡은 팽성레포츠공원, 농성공원, 추팔근린공원 그리고 개발진행 중에 있는 부용산공원과 내리공원이 있다.


고대 이후 팽성읍지역은 농업農業과 어업漁業, 염업鹽業이 발달했다. 염업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여지승람에 ‘고려후기 경양현을 설치하고 수령에게 염장관을 겸임시켰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나 명례궁과 같은 궁실, 순화군 같은 왕족, 홍윤성이나 서거정 같은 구신들, 역원, 군대 등이 주도해 궁방전과 역둔토를 간척했다. 조선후기에는 민중들이 간석지나 공유수면을 메워 원뚝을 쌓고 간척하는 경우도 많았다. 군문교에서 추팔리 사이로 펼쳐진 통한들은 이 시기에 간척된 들판이다. 일제강점을 전후해서는 신궁리, 신호리 일대의 한판들, 번개들, 본정리의 중심들(왕십리들)이 간척됐고, 신대리, 도두리 일대의 도두리들은 한국전쟁 뒤에 대규모 간척이 이뤄졌다.


노양리 경양포, 노산리 노산포, 노성리 신성포, 구 대추리의 곤지나루, 석봉리의 원봉나루에서는 포구상업과 어업이 발달했다. 노양1리 경양포는 고려시대 하양창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이었다. 안성천 하류의 어업과 포구상업은 아산만방조제의 공으로 중단됐고, 대신 내수면어업이 시작됐다. 상업은 1952년 안정리와 함정리 일대에 군이 주둔하면서 기지촌 중심 상업으로 변화됐다. 1993년 11월 팽성읍 추팔2리에 추팔지방산업단지가 조성돼 농업과 상업만 있었던 팽성읍에 공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됐다.



팽성읍의 행정 중심기관 팽성읍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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