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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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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영리新永里39)


고려시대 신영장新榮莊의 중심이다. 장은 처·향·소·부곡과 함께 고려시대의 특수 행정구역이었다. 신영장의 범위는 신영리·방림리·내기리·석정리 일대로 추정된다. 신영장은 화살과 칼을 제조하는 역을 담당했다. 신영장은 조선 태조 7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수원부에 편입됐고 중간촌·직산말을 비롯해 일부 마을은 직산현 외야곶면과 양성현 승량동면에 속했다. 신영리 일대가 하나의 행정구역 안에 묶이게 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다. 1914년 신영리·가장동 일부·안외면 신영리·현암면 신영리·서두호西杜湖를 통합해 진위군 포승면 신영리라고 했다.


신영리의 자연마을은 직산동(1리)·매상동·서두매(2리)·중간촌(3리)·가장동(4리)이 있다. 가장 큰 마을은 매상동으로 약 120세대이고 가장 작은 마을은 중간촌으로 30여 세대가 거주한다.


매상동에 함양박씨·해주오씨·달성서씨·함평이씨, 중간촌에는 기계유씨·남양홍씨, 가장골에는 함평이씨가 많다.


신영新榮이라는 지명은 가장동 ‘그이내’에서 왔다고 전한다. 신영리에 장이 섰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신영장’이라는 지명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이내’라는 지명은 바닷가여서 ‘게(그이)’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유래됐다. 가장동은 윗말·아랫말·벽장골·동쪽말로 나뉜다. 벽장골은 옛날엔 마을이 너무 후미져서 외적이 쳐들어와도 들어올 수 없는 피란곶이였다. 신영2리 직산동은 옛 직산현 땅이다. 직산말은 장작골로도 불려진다. 이곳의 산림이 우거져서 장작이 흔했기 때문에 유래됐다. 직산동은 바다와 가까워서 간척지가 많다. 간척의 흔적은 가래틀(가래로 간척한 들)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다. 새바탱이는 직산말 앞 신전포의 자연지명으로 본래 간석지였다가 새로 간척된 땅이다. 평택항 건설로 사라진 신전포는 조선시대에는 세곡도 운송했고 1990년대 전까지 배가 닿았다. 매상동은 현덕면 장수리(두메) 서쪽에 위치해 유래됐다. 매상마을 남쪽 산을 ‘마산두’ 또는 ‘말머리산’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한자로 ‘마상馬上’이라고 부르다가 음이 변하면서 매상으로 된 것이 아니겠냐는 주장도 있다. 중간촌은 옛 양성현 땅이어서 ‘양성말’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이곳에 양성현 승량동면 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신영리는 바다와 인접한 마을이지만 근대 이후에는 어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쯤 일본으로 실뱀장어 수출이 늘어나면서 어업을 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신영리의 어업은 아산만방조제 준공 뒤에도 명맥이 이어지다가 1990년대 초 평택항 확장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쇠퇴했다. 신영리 일대의 경작지도 간척사업의 결과로 형성됐다. 해방 후 간척사업은 1960년대 전후다. 제3공화국 초기에는 포승면장 정모 씨가 주민들을 동원해 삽과 지게만으로 매상골 동쪽 들판을 간척했다. 황경묵씨도 주민들이 간척해 일부 농사를 짓던 땅을 한국전쟁 뒤 정부자금을 끌어들이고 주민들을 동원해 대규모로 간척했다. 신영리는 농업문화와 어로문화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평택항 건설과 황해경제자유구역 등 주변지역에 대한 개발소식이 전해오지만 아직까지는 마을공동체가 굳건하다.



평택항으로 개발되기 전의 신영리 신전포(2002)

| 평택항으로 개발되기 전의 신영리 신전포(2002) |



평택항으로 개발되기 전 신영리 앞 갯벌

| 평택항으로 개발되기 전 신영리 앞 갯벌 |



주석

39) 이송헌(82세), 2006년 7월 자택에서 인터뷰
      이민승(70세), 2006년 7월 서두메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