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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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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홍원리洪原里41)


무수산 능선을 따라 발달한 홍원반도는 고려시대 육내미부곡·포내미부곡이었다가 조선시대 들어와 수원군 포내면에 편입됐다.


1914년 홍원리라고 해 진위군 포승면에 편제됐다. 홍원리 일대는 조선시대 홍원마장터였다. 조선은 홍원곶에 마장馬場을 두고 군사용이나 파발용 말과 궁실이나 고관들이 소비할 소를 사육하게 했다. 조선후기에는 감목관이 파견돼 괴태곶과 양야곶의 마장까지 관할하게 했다. 주민들은 마장의 목부로 일하며 목장전을 경작해 살아왔다. 마장은 갑오개혁 뒤 폐지됐다.


홍원리의 자연마을은 1리에서 7리까지 모두 7개 마을이다. 호도 작게는 50∼ 60호에서 크게는 1백 호가 넘는다. 해방 전만해도 홍원리와 석정리 일부지역은 같은 마을이었고 전체 호도 70호가 넘지 않았으며 구장(이장)도 한 명뿐이었다. 인구가 크게 증가한 것은 한국전쟁 뒤부터 1970년대 말까지 진행된 간척사업 때문이다.


홍원리의 본디 마을은 홍원2리 마장과 3리 자오다. 마장마을은 조선시대 국영목장이 있어 ‘말마당’으로도 불렀다. 마장 안에는 마장·감상골·황골 같은 작은 마을들이 있다. 전체 호는 70여 호이며 그 가운데 55호가 마장마을에 속했다. 마장마을 북서쪽에 자리 잡은 황골은 7∼8호의 작은 마을로 황씨촌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이주하고 2∼3호 밖에 남지 않았다. 홍원1리 외원과 홍원 4·5·6·7리는 간척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1리는 한국전쟁 뒤 황해도 연백피란민들이 일군 마을이고, 4리부터 7리까지는 1978년 대청댐 수몰민들의 집단 이주지이다.


1974년 남양만방조제 건설 전 홍원리 일대는 길쭉한 반도와 들쭉날쭉한 리아스식 해안을 가진 바닷가 마을이었다. 농지라고는 무수산 자락에 형성된 밭과 해안가에 소규모 간척으로 조성한 경작지가 전부였다. 조선시대 홍원리 일대 경작지는 대부분 목장전이었다. 조선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목장이 폐지된 뒤에도 목장전을 주민들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주민들은 단결해 정부와 협상하여 목장전을 되찾았다. 홍원리 일대의 경작지가 확대된 것은 한국전쟁 뒤 간척사업의 결과다. 홍원리 일대의 갯벌과 황무지를 대규모로 간척한 것은 일제였다. 일제는 목장용지와 농민들이 피땀 흘려 되찾은 목장전을 빼앗은 뒤에도 호구진 동쪽에서 청북면 고잔리로 이어진 갯벌을 수레를 동원해 간척했다. 일제의 간척은 실패했고 일제 말 덕우리의 대지주 이강세가 주민들을 동원해 시도한 간척도 거센 물살에 밀려 실패했다. 한국전쟁 뒤 정부가 황해도 연백지역 피란민들을 중심으로 간척을 시도해 성공했고, 남양만방조제가 완공된 뒤에는 경작지가 확대돼 충청남도 대청댐 수몰민들까지 정착했다.



조선시대 홍원목장이 있었던 홍원2리 마장과 마장앞뜰(2005)

| 조선시대 홍원목장이 있었던 홍원2리 마장과 마장앞뜰(2005) |



주석

41) 박철재(79세), 임병호(82세), 2005년 7월 홍원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
      연중희(75세), 2005년 7월 홍원4리 마을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