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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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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천리東泉里46)


갑오개혁 후 진위면 일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동천동·사후·용인군 서촌면 사후를 통합해 진위군 북면 동천리라 했다. 동천리라는 자연지명은 동천1리 동치골에서 왔다.


동천리의 자연마을은 동칫골(1리)·절뒤(2리)다. 동천1리 ‘동칫골’은 85호가 넘는다. 조씨와 지씨가 개척했고 병자호란 뒤 입향한 경주이씨 상서공파가 큰 세력을 형성했다. 주민들은 ‘동천리 30리 이내에서는 경주이씨 땅을 밟지 않으면 나다닐 수 없었고 가을에 도조賭租만 수천 석을 거둬들였다’고 말했다. 동천1리는 식수가 넉넉하고 고라실논이 많아 생활조건이 유리했다. 주민들은 예로부터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지금도 농업인구가 대다수다. 근래에는 비닐하우스 쌈채소 재배가 성행해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동천2리 사후동(절뒤)은 절 뒤에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서 유래된 지명이다. 용인시 남사면 봉명리·오산리 고현동 등 3개 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70호에 달하지만 대부분 흩어져 있다. 해방 후까지만 해도 30호 남짓 됐지만 최근 전원주택과 기도원, 요양원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늘었다고 한다. 성씨는 각성바지지만 옛날에는 함평이씨 장양공파의 사패지여서 이씨가 대성을 이루었다. 절뒤는 산이 높고 계곡 사이에 옥토가 형성돼 예나 지금이나 논농사·밭농사가 발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지주와 동척농장, 친일지주의 땅이 많아서 수탈이 심했다. 제1공화국 시기 적산농지불하와 농지개혁으로 자영농이 됐지만 지금도 큰 부자는 많지 않다. 사후동 능골에는 남이 장군의 어머니 정선공주의 묘가 있었다. 1980년대 초 후손들이 선산이 있는 경남 의령으로 옮겨갔고 지금은 빈 무덤이다.



실학사상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동천1리 동치골(2013)

| 실학사상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동천1리 동치골(2013) |



남이 장군의 전설이 남아 있는 동천2리 사후동(2006)

| 남이 장군의 전설이 남아 있는 동천2리 사후동(2006) |



주석

46) 김상용(59세), 이범흥(79세), 이윤범(70세), 2006년 7월 마을 안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