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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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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북리下北里48)


갑오개혁 뒤 진위군 일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성뒤마을을 진위군 북면 하북리라고 했다. 하북리의 자연마을은 성뒤(1리)·대정촌(2리)·새마을촌(3리), 도시 확장으로 1리에서 분동된 4리로 형성됐다. 성뒤는 4개 마을의 중심이다. 본래 성뒤는 광주이씨 동족마을이었다. 광주이씨는 조선시대 8명의 병사兵使를 배출한 무인가문으로 약 200여 년 전에 입향했다. 해방 전 하북은 30여 호에 불과했고 동족마을이어서 결속력도 강했다. 일제강점기(대정 연간) 철길건너편에 대정촌이 개척되면서 두 개 마을로 늘었고, 1973년 경 하북1리에 국도가 확장되면서 새로 마을을 형성해 세 개가 됐으며, 홍원제지 등 공장설립으로 호가 늘어나 네 개로 분할됐다.


근대 이전만 해도 하북리는 오산천을 따라 바닷물이 유입되고 갯골이 형성됐던 마을이다. 당시에는 하천을 따라서 갈곶리까지 배가 들어갔으며 갈곶리 주변의 나루에서는 소금·젓갈·어물이 교역됐다. 바닷물이 들어오던 간석지가 개간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하북리에서 간석지가 가장 많았던 곳은 대정촌 일대였다. 일제는 빈농들을 동원해 대정촌일대를 개간해 동양척식(주)에게 관리를 맡겼다. 동척농장이 만들어지자 몰려든 빈농들은 농장 주변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했다. 그래서 ‘벌말’이라고도 불렀고 대정大正(1912∼1926) 연간에 형성됐다고 해서 ‘대정촌’이라고도 했다.


하북리는 일제 말 공출미와 공출가마니를 집하하던 마을이다. 집하 장소는 하북육교 아래인데, 일제 말에는 하북장이 생겨났다. 하북장은 해방 후 시들해졌지만 한국전쟁 전까지는 명맥이 유지됐다. 이 마을은 근래 근교농업으로 유명하다. 특히 대정촌은 방울토마토·오이·애호박 등을 재배해 출하하고 있으며, 정보화 마을로 지정돼 가족단위로 채소 수확 체험을 할 수 있다.



일제 말 공출가마니 집하장이었던 하북1리 성뒤(2006)

| 일제 말 공출가마니 집하장이었던 하북1리 성뒤(2006) |



주석

48) 이용익(72세), 2006년 6월 하북1리 자택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