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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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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야막리野幕里49)


야막리는 갑오개혁 후 진위군 이서면에 속했다. 1914년 진위군 북면 야막리라고 했다. 야막은 우리말로 ‘들막’이다. 들막은 옛날 유이민들이 들막을 치고 야막들에 정착하면서 유래됐다. 일제강점기 마을 규모는 30호 내외였고 지금은 55호다. 마을은 밀양박씨가 터를 잡은 곳에 이씨, 김씨들이 들어와 정착했다. 한국전쟁 뒤 마을규모가 확대된 것은 야막들이 넓어 경작지도 많고 품 팔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야막리는 천도교인들 마을이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천도교인이었다. 마을 안에 교당도 있었고, 집회가 있는 날에는 봉남리·회화리·화성시 양감면에서도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박창훈을 비롯한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돼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헌병들은 마을을 뒤지며 젊은 남자들을 잡아갔다. 잡혀간 사람들은 손가락이 뒤틀리는 고문 등 갖은 악형을 당했다.


야막들은 개간지다. 아산만과 남양만에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개간지는 농업용수 부족과 수해로 고통을 겪었다. 주민들은 수월암리 위쪽 오산천에 임시로 보를 쌓아 농업용수를 확보했다. 보는 양력 4월에 쌓고 가둬둔 물로 모내기를 했다. 야막들의 경지정리는 1968년에 실시됐다. 경지정리 뒤 평택호와 남양호 물이 들어오면서 보 축조도 중단됐다. 주민들 대부분은 농민이다. 논농사를 많이 짓지만 근래에는 하우스에 방울토마토·애호박·채소재배를 하는 농가가 부쩍 늘었다. 1960∼70년대에는 축산업도 많이 했다. 이 마을은 오랜 역사와 함께 당제·정제·두레와 같은 공동제의나 공동체조직이 발달했고 새마을운동도 활발했다.



일제강점기 천도교 진위교구가 있었던 야막리(2013)

| 일제강점기 천도교 진위교구가 있었던 야막리(2013) |



주석

49) 박종구(92세), 2006년 8월 야막리 자택에서 인터뷰
      김명준(72세), 이정일(74세), 최봉예(71세), 임종인(65세), 2013년 2월 야막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