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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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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리新里50)


갑오개혁 후 진위군 이북면지역이었다. 1914년 진위군 북면 신리가 됐다. 신리新里라는 지명은 ‘새말’의 한자지명이다. 신리는 진위면의 들머리다. 남쪽의 독곡동 오리골·북쪽의 진위면 하북리·동쪽의 마산리와 경계를 이룬다. 동쪽에는 국도 1호선이 지나며 북쪽으로는 진위천이 흐른다.


신리는 진위천 변 남쪽 들판에 형성돼 자연지명이 ‘벌말’이다. 벌말은 1960년 진위천 제방堤防과 1974년 아산만 방조제 건설 이전에는 만성적으로 수해를 겪었다. 제1공화국 시기에는 30호가 안 됐지만 지금은 2백여 호가 넘는다. 1960년 진위천에 제방이 축조되면서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정착했기 때문이다. 1990년 전후에는 한국번디·YKK같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증가했다. 처음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은 온양방씨로 알려졌다. 한 때는 ‘방촌말’이라고도 불렀고 새로 형성됐다고 해 ‘새말’이라고 했다. 일제강 점기에는 문화유씨가 많이 거주했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신리는 교통의 요지였다. 삼남대로와 진위천 수로가 만나는 지점이어서 장호원이라는 역원도 설치됐다. 장호원은 조선후기 삼남대로가 봉남리-마산리-흰치고개 구간으로 확정되면서 폐원閉院됐다. 장호원은 신리 동쪽 ‘원터거리’에 있었다. 원터거리는 주막거리라고도 부른다.


현재 신리 주민들은 벼농사나 근교농업을 하는 농가와 회사원들로 구성됐다. 전통의 농가들은 토착민이거나 1960년대 전라도 이주민들이 많다. 일제강점기부터는 수박과 참외재배가 발달했다. 진위천 변에서 수확한 참외는 원두막에서 판매하기도 했지만 국도 1호선 신리부근에서 집하돼 서울 등으로 출하됐다. 근래에는 방울토마토와 채소·화훼농사를 많이 짓는다.



조선전기 삼남대로 장호원이 있었던 신리(2006)

| 조선전기 삼남대로 장호원이 있었던 신리(2006) |



주석

50) 유인숙(75세), 김씨(71세), 2006년 6월 신리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