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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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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화리檜花里56)


갑오개혁 뒤 진위군 일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진위군 서탄면 회화정리라고 했고 나중에 회화리로 고쳤다. 회화리라는 지명은 마을 앞에 회나무 정자가 있어 회화정이, 또는 회화나무정이라고 부르던 것이 한자화하면서 유래됐다.


회화리는 단일마을이다. 100호가 넘으며 성씨는 밀양박씨와 연안차씨가 많다. 입향순서는 먼저 200∼300년 전 밀양박씨가 처음 정착했고 나중에 연안차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회화리는 진위천 변의 마을이다.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사리 때 회화리까지 들어왔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의 마을은 포구마을이거나 어촌인 경우가 많지만 회화리는 농촌마을인데도 갯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맑고 시원한 물이 나오는 좋은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제강점기 회화리는 서탄면의 중심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찰주재소도 마을 안에 있었다. 회화리가 중요했던 것은 해정들의 궁방전과 둔토의 수탈과 식량수탈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수원 용주사의 땅도 많아서 주민들은 일본인이나 용주사, 조선인 지주의 소작농이었다.


회화리는 윗말과 아랫말로 구분한다. 두 마을의 경계는 진위천이다. 그래서 윗말을 ‘위해정이’, 아랫말을 ‘아래해정이’로 나뉘어 부르기도 한다. 위 해정이는 ‘야리’라고도 불렀다. 1951년 K-55 미공군기지 건설로 폐동됐다. 해방 전후 회화리에는 나루터도 있었고 방풍림도 조성됐다. 뱃터는 지금도 ‘나들이’로 부르는데 서울방면으로 건너가는 나루는 ‘서울나들이’, 정남면 방면으로 건너가는 나루는 ‘정남 나들이’로 불렀다. 방풍림은 ‘한울타리’라고 불렀다. 방품림이 조성될 때 진위천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수풀이 우거진 마을처럼 보였다고 한다.


회화리에는 평택에서 가장 오래된 회화리장로교회가 있다. 회화리장로교회는 1901년에 설립됐다. 3·1운동 때에는 회화리장로교회의 영수 차덕겸이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한국전쟁 때에는 피란민들과 전쟁고아 구제 사업을 하는 등 나눔과 봉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회화리는 근대교육에도 앞장섰다. 1920년 최기환의 주도로 서탄면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회화리강습소가 설립됐다. 1924년 서탄면장 이필성의 주도로 진서강습소가 설립됐으며 1954년 회화리장로교회 주도로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



평택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회화장로교회(2006)

| 평택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회화장로교회(2006) |



주석

56) 차경환(66세, 이장), 박찬옥(85세), 박완용(70세, 노인회장), 2006년 2월 회화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