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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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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등리長登里61)


갑오개혁 뒤 진위군 이탄면이었다. 1914년 장등리·구억리·야리野里를 통합해 장등리라고 했다. 장등이라는 지명은 장등1리의 자연지명인 ‘진등’에서 왔다.


장등리의 자연마을은 진등(1리)·구억말·으능쟁이(2리)다. 장등1리 ‘진등’은 약 40호다. 이 마을은 본래 미군기지 안 은행나무 주위에 있었다. 1952년 K-55 미공군기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이주됐다. 주민들은 보상기한도 정해지지 않는 채권을 보상금으로 받고 마을 뒤쪽 산등성이로 이주했다. 그 마을이 현재의 진등마을이다. 미군부대 안에 남겨진 은행나무는 장등2리 으능쟁이 은행나무와 함께 장등리를 상징했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본래 암·수로 심어진 것이었고 두 마을의 제당이기도 했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서 논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무 밑으로 모여들었고, 단오 때는 그네뛰기도 했다. 고향마을과 은행나무를 두고 나온 주민들은 옛 마을에서 가져온 폐목재로 집을 짓고 산을 일구며 살아왔다.


장등2리 ‘구억말’은 ‘으능쟁이’라고도 한다. 으능쟁이는 ‘은행나무 정자’의 사투리다. 마을의 역사는 근거가 될 만한 사료가 없어 예측하기 어렵다. 성씨도 각성各姓이어서 가문의 내력으로 추적하기도 힘들다. 토착민만 대략 60호쯤 되는데 해방 전에는 30호 남짓 됐다가 미군기지와 관련해 70호가 넘었고 K-55 미공군기지 확장과 도시이주로 10여 호가 줄었다. 근래에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새로 건축한 빌라들이 많아 100호가 넘는다. 구억말은 1952년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마을도 옛 모습 그대로다. 같은 장등리에 속했던 야리마을과 이웃마을인 가마골, 신야리는 사라지고 자연경관이 크게 변했다.



장등1리의 상징이었던 K-55 미공군기지 내 은행나무(2013)

| 장등1리의 상징이었던 K-55 미공군기지 내 은행나무(2013) |



주석

61) 박만희(70세)씨 부부(장등1리), 김한우(81세, 장등2리), 2006년 7월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