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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상업과 장시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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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후 중국 명·청 시대와 일본 에도시대는 상업과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서양에서도 신대륙이 발견되고 아시아로의 새로운 항로가 개척된 이후, 무역과 상 업이 빠르게 성장해 세계를 연결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상업 발달이 상대적으로 저조했고 정부에서도 상업발달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다.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사회를 후진적이었다고 매도하기에 앞서 조선은 왜 이러한 특징을 갖게 됐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 행상(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



조선시대는 물론, 전근대 모든 사회에서 경제와 생산의 근간은 농업에 있었다. 농업 이외의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무본억말務本抑末’이란 경제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근본인 자기 수양[]에 힘쓰고 사사로운 이익[]을 멀리하라는 유교이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농업을 비롯한 1차 산업과 달리 직접적인 생산활동 없이 재화유통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상업과 3차 산업은 근본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조선시대는 본업本業에 해당하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반면 말업末業에 해당하는 상업은 국가 통제 하에 두거나 심지어 억제하려고까지 했다. 잉여 재화의 축적과 유통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 주의적 가치는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소비하는 절용節用의 가치관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재화의 교환은 국가의 통제 속에서 또는 통제를 벗어난 부분에서 상업 활동으로 꾸준히 존재해 왔다. 조선시대 민간 상업 활동 중 하나가 바로 장시場市다. 개성을 제외하 고 한양과 가까운 경기지역에는 장시가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통제 속에서도 조선후기 경기도 내 각 지방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고 장시가 개설됐고, 평택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후기 상업발전 지표는 장시의 확대다. 조선후기 상품유통은 장시와 포구浦口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거의 모든 농민이 하루 안에 장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장시의 밀도가 높 았다. 『동국문헌비고』 와 『임원경제지』, 『대동여지통고』 등의 조선후기 지리지에는 진위현과 평택현(현재의 팽성)의 장시뿐 아니라 안중과 오타, 그리고 소사장까지 포함한 평택지역 장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평택지역 장시의 변화]


구분 동국문헌비고 1770년 임원경제지 1830년 대동여지통고 1834년
안중장 1일   2일
오타장 1일    
진위 읍내장 2일   2일
진위 신장   1일  
진위 구거리장 4일   4일
소사장 5일 5일 5일
평택 읍장 3일 3일 3일


평택지역 장시의 특징은 대로에 위치한 장시들의 개시일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조정돼 있다는 점이다. 안중과 오타장을 제외한 장들은 서로 다른 날에 개시되는데 이는 개시일이 장시의 거리에 따라 조정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역주민 입장에서는 인접한 장시들의 개시 날짜가 최대한 벌어져야 두 장을 모두 이용하기 좋은 반면 행상 은 짧을수록 장날에 따라 행상하기가 편리했다. 따라서 행상에게 유리하도록 인접한 장시의 개시간격이 1일인 경우와 지역 주민이 편리하도록 2〜3일인 경우의 빈도가 거의 같았다. 표에서도 인접한 장시간에 개시간격이 2일인 경우와 1일인 경우가 비슷한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동국문헌비고』에 보이던 오타장은 이후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오타장이 점차 인근 안중장에 흡수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타장은 안중장과 개시일이 같았는데 안중장 이 교통의 요지였기에 점차 안중장으로 사람과 재화가 집중되면서 인근 오타장의 역할이 사라지게 됐다.



| 안중우시장(1972) |



안중장은 서산, 당진 방면의 충청지역과 경기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있었으며 평택지역에는 아산, 당진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지나고 있었다. 그 길은 당진군 송악면 한진나루에서 아산만을 건너 평택시 포승면 만호나루로 가는 길이었다. 안중장은 만호나루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유통에 유리했기 때문에 오타장을 흡수해 점점 더 성장했다. 안중장은 평택의 포승면·오성면·청북면·현덕면 등 서부 4개 면을 포괄하고, 북쪽으로 발안장·수원장과 연결됐기 때문에 주변지역 일대의 거래가 집중됐다.
더구나 안중장에서는 경기도에서도 손꼽히는 우시장(소시장)이 열렸다. ‘송아지는 한진 나루를 통해 충청도 산골로 보내 기르고, 다 큰 소는 만호나루로 건너와 경기도 일대에서 부렸다’는 말이 있듯이 두 나루를 통한 충청도와 경기도의 소 거래는 활발했다. 충청도에서 만호나루를 통해 건너온 소는 안중장에서 매매됐다. 안중장에서는 장시의 거래를 활성 화하기 위해 음력 7월 백중百中 무렵에 싸전에서 송아지와 쌀, 쟁기 등을 상품으로 걸고 큰 씨름판을 벌였다고 한다.
진위 읍내장과 신장이 다른 날짜에 열리고 있는 것은 자료의 한계가 있으나 읍내장이 사라지고 점차 다른 날짜에 열리던 신장이 중심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2일에 열리던 진위 읍내장은 사정상 개시일을 1일로 바꿔야 했는데 이유는 안성장 때문 이었다. 진위천 유역에는 여러 개의 장시가 열렸다. 수원의 북문외장, 남문외장, 오산장, 진위의 읍내장, 안성의 읍내장, 용인의 도촌장, 양성의 현내장과 소사장 등이다. 특히 안성장은 매우 큰 장시였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도 지적했듯이 안성은 이 지역 시장권 의 중심이었다. 안성장은 2·7일이어서 6번 열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다음날까지도 계속 거래해 한 달에 거의 12일 동안이나 개시됐다. 안성은 수운水運이 불가능한 경기 와 충청지역으로 물자를 공급하고 한강상류의 장호원부터 서해안의 둔포와 군문포까지 상업을 확장했다. 진위 읍내장은 진위천과 안성천을 통해 안성장과 연결돼 있었다. 안성장도 진위 읍내장과 같은 2일에 개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안성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은 진위 읍내장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진위 읍내장은 개시 일을 바꿔 1일을 개시일로 하는 신장이 나타나자 읍내장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시가 주변 농민을 위한 소매상업 유통의 중심지라면, 포구는 여객 주인의 중개로 선상船商과 육상陸商 간의 도매 거래가 이뤄지는 원격지 유통의 결절점이다. 포구의 주요 거래 품은 해안지방의 어염魚塩과 내륙지방의 곡물 및 임산물이었다. 포구에서의 유통은 장시와 달리 부피가 크고 중량이 무거운 상품도 거래가 가능한 특징이 있다.
평택지역에는 서천-비인-남포-보령-홍주-결성-해미-서산-태안-당진-면천-아산-직산-평택으로 연결되는 항로가 지나고 있었다. 군현 내에서는 가장 큰 포구 중심으로 주위의 소포구가 연결되고, 군현을 넘어서는 해상유통권에서 각 지역의 중심포구가 중심지로 기능했다. 평택지역에서 중심역할을 담당한 포구는 아산지역의 둔포였다. 금강 상류와 아산만의 포구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등장한 둔포장은 진위·양성·직산·성환·천안·온양·아산 등 사방 60∼70리 지역의 유통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후기 수운 유통은 여객 주인을 통한 거래였다.
여객 주인은 화물을 직접 매입하거나 위탁받아 거래했다. 개항 이후인 1895년 둔포에는 여객 주인이 22∼23호 정도 있었다. 여객 주인은 휘하에 보부상단을 거느리고 각 지역의 장시를 장악했다. 둔포를 거점으로 하는 보부상단은 아산과 평택을 관할했다. 당시 둔포 보부상 규모는 평택·아산 두 지역에 500여 명 가량 됐으며 이 중 평택에 거주하는 보부상만도 2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평택지역은 둔포와 긴밀히 연결됐고 이를 통해 평택지역은 전국적인 해운, 수로 유통망과 연결됐다.
조선시대는 절약을 강조해 상업발전을 자극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러운 상업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평택지역은 한양과 삼남을 잇는 주요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 이며 수원과 안성 등 물류 중심지 인근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또한 서해와 여러 하천들을 통해 해운과 수운이 발달할 수 있었고 둔포를 통해서 전국적 유통망에 연결돼 있었다.



| 보부상(권용정 그림, 1800년대)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