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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여객 주인의 금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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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는 자본규모가 큰 도매상인이 창고업·금융업·위탁판매업·무역업·숙박업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물품과 화폐, 신용의 흐름을 장악했다.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여 객 주인(객주)이었다. 여객 주인은 한양과 지방의 주요 포구에서 활동했다. 원래 한강 연안의 여객 주인이란 지방에서 한강을 통해 상품을 팔러오는 상인들의 물건을 대신 팔아주 고 대가를 받거나 상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지방 상인들이 물건을 빨리 판매할 수 없어 여객 주인은 창고를 만들어 물건을 임시로 보관해 주었고, 또 시전 상인과의 거래를 주선해 주었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 한강 연변에는 개인 창고가 많이 생겨났다. 창고에 있는 물품은 일정 기간 보관하다 수요가 부족해 값이 오르게 됐을 때 판매하기도 했다. 이는 창고가 단순한 보관 기능이 아니라 가격 상승을 조장하는 독점행위의 수단이기도 했음을 말해준다.
여객 주인은 단순히 상인들의 상품을 중간에서 주선하는 정도를 넘어 물품판매를 담보로 급전을 융통해주기도 했다. 각종 어음이나 수표를 발행해 자본 회전 속도의 차이를 메워주 는 역할도 했다. 상인들로부터 물건을 맡게 되면 일종의 보관증인 임치표任置票를 발행하고 이를 담보로 급전을 융통하기도 했다. 영업규모가 커지면서 은행과 유사한 업무를 하기 도 했다. 출차표出次票는 돈을 지불할 때나 맡긴 물건을 찾을 때 작성하는 증서로 일시적인 금고 역할을 했다. 아울러 매각한 금액을 물주가 바로 가져가지 않고 맡길 경우 객주는 금액에 대한 이자를 더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객주는 부수적으로 대부업도 겸했다. 객주는 물품 판매를 위탁받았을 때 물품에 대한 금액을 미리 지불하는 가도금假渡金, 위탁판매를 조건으로 매상賣上하는 전도금前渡金, 또는 토지를 담보로 대출하는 대부금貸付金 등의 방식으로 대출업도 겸하고 있었다.
객주는 ‘환’이나 ‘어음’과 같은 신용화폐도 발행했다. 환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돈을 보낼 때나 자신이 현금을 직접 가지고 갈 때의 부담을 덜기 위해 사용했던 신용거래 수단이다. 환은 나름의 신용관계를 기초로 성립했으며 계약관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때는 환을 물리는 퇴환退換을 하거나 여러 차례로 나누어 받을 수도 있었다. 어음은 차후 일정 금액을 지급하겠다고 보증하는 오늘날의 약속어음과 유사한 것이었다. 어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경우, 양도받은 사람은 발행인에게 제시해 지불기일과 금액을 밝히는 것이 통례이며 이를 답음踏音이라고 했다. 어음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가 가능하긴 했으나 지불기간이 한 달 이내였으므로 대체로 2∼3회의 양도로 그쳤다. 환과 어음은 단순한 차용증서가 아니라 신용화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만 어음의 액면가는 환 액면가보다는 일반적으로 영세했다. 환이 대체로 큰 규모의 상인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신용환표였다면 어음은 주로 중소상인들과 소생산자들 사이에서 유통됐다. 이처럼 조선후기 여객 주인은 단순한 상품거래의 중개상 역할뿐 아니라, 금융업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여객 주인은 개별 상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다가 점차 역할과 권한이 커지면서 일정한 지역을 관할하는 영업권을 가지게 됐다. 한양의 여객 주인 중에서는 평택과 진위, 그리고 직 산 지역 상인을 상대로 이러한 역할을 한 사람도 있었다. 18세기 초에 활동했던 기득규奇得奎라는 사람은 충청도 직산, 경기도 진위, 평택을 관할하는 한양의 경강 여객 주인이었 는데 도적을 만나 문서를 잃어버린 후 자신의 영업권을 보장받기 위해 진위·평택·직산관아에 소지所志를 올렸다는 자료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평택지역 상인들의 서울 출시가 늘어나면서 여객 주인권의 가격도 오르게 됐다. 평택 등지의 여객 주인권 가격은 1860년에서 1884년 사이 9배 가까이 급등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평택지역과 한양 사이에 상 품 거래가 활발해졌음을 의미한다.
평택 현지의 여객 주인 활동도 활발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위나 평택보다는 평택을 포함한 지역유통의 중심지였던 둔포와 수원 여객 주인의 영향이 더 컸다. 둔포장은 개장 이 후 요로원장을 흡수할 정도로 큰 장시이자 포구였다. 둔포 중심 유통구역은 진위·양성·직산·성환·천안·온양·아산 등 사방 60∼70리에 달했다. 아산·평택 지역에서 생산되 는 쌀과 콩은 대부분 둔포에 집하됐다. 수원 역시 경기도 남부 지역의 유통 중심지였고 남양만 인근의 풍부한 해산물과 경기도 내륙 지역의 농산물을 교환하는 역할을 했다.
둔포의 경우 1895년경 여객 주인이 22∼23호에 달했는데 이들 둔포 객주는 휘하에 보부상단을 거느리고 각 지역의 장시를 장악했다. 둔포를 거점으로 하는 보부상단은 그 유통 권에 포섭된 아산과 평택을 관할했다. 그러나 1909∼1910년에 작성된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의하면 경부철도의 개통으로 둔포는 큰 타격을 입었고 유통권은 천안에 흡수됐다.
수원에서도 여객 주인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19세기 말에는 4호가 객주업에 종사한 것으로 등록돼 있다. 화성 남문 밖의 김홍선, 북문 안의 임흥수 등은 대객주로 많은 소상인들 을 거느리고 일대의 유통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1900년대 초 수원지역에 침투해 온 일본상인들과도 경쟁을 벌일 만큼 영향력이 컸다.
둔포와 수원의 여객 주인들은 금융업 서비스도 제공했다. 보부상은 둔포나 수원 등지의 객주를 통해 각 지역의 물산을 유통시킬 수 있었다. 일부 보부상은 여객 주인에게 자금을 얻기도 했으며 여객 주인은 신용업무를 맡기도 했다. 평택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던 상인들은 대개 여객 주인의 집에서 상품을 거래하고 받은 어음을 할인받고 그 어음을 기초로 다 시 상품을 구입했다. 또한 객주는 각 지방에서의 거래처와 연락하며 환업무를 했다. 개인의뢰는 물론 지방으로부터의 납세도 이 방법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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