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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운동>지역 시민운동의 역사>1987년 6월 민주화이전
■ 1987년 6월 민주화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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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 군부권위주의 정권이 등장하자 사회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단체 활동이 억압된다. 특히 1972년 10월 유신은 개발독재국가, 권위주의 정부 에 의해 보다 철저한 ‘배제의 정치’를 시도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철저한 예방적 억압체제를 형성했다.
평택지역은 미군부대(K-55, K-6)가 주둔하는 한편, 민주화운동의 저수지라고 할 수 있는 대학과 저항적 종교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활성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의 유혈적 학살과 불법적 권력 찬탈과정은 저항적 사회운동을 강화하는 요인이 됐다. 대학 입학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평택지역 학생들도 저항적 대학문화의 접촉과 반독재운동에 참여하는 비율도 높아졌다.
이 시기에 서울·수원·천안·청주 등 인근 지역 대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지역단체에 가입해 학술·문화 활동을 진행하게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에는 ‘흥사단 평택지부(현 평택·안성흥사단)’, 청년학술문화단체‘송암회’ 정도가 지역 활동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 창립과 함께 시작한 흥사단 평택지부는 평택지역 시민운동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청년문화 운동단체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겨레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하는 정신을 실천해왔다.
흥사단 평택지부는 청소년 중심의 동아리 활동을 통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무실·역행·충의·용감 정신을 배우고 따르며,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의식 고취를 위해 캠프와 토론회 등으로 지역청년운동의 흐름을 이어 나간다. 최근에는 ‘참되고, 진취적인 청소년 육성을 위한 수련활동과 청소년 운동, 건전한 인격형성을 위한 사회교육운동, 깨끗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명사회운동,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통일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평택흥사단은 청소년 아카데미, 청소년 영상아카데미, 청소년쉼터, 청소년유해환 경감시단 운영을 비롯해 평택시청소년단체연대회의, 평택민주단체연대회의 참여 등 지역 현안과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지역사회운동을 왕성하게 진행하고 있다.

| 평택·안성흥사단 민주시민 리더십교육(2013) |



평택흥사단의 뒤를 이어 초기 평택지역 시민운동의 대표적 단체는 1978년 2월 창립된 청년학술문화단체 ‘송암회’다. 송암회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송탄지역의 교육문화운동단체 역할을 해왔다.
송암회는 송탄지역의 젊은이들이 미군기지가 있는 척박한 지역문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창립했다. 초기에는 지역청소년을 위한 방학 무료공부방을 열고 매년 정기연극제를 개최했으며 송암월보 발간, 솔바우 발간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80년대 학생운동 영향을 받은 회원들이 활동에 참여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혔다. 정기학술세미나를 개최하며 역사·노동·여성·경제사·철학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폭넓은 토론을 하며 건강한 지식인상 정립에 노력했다.
특히 1981년 송암야간학교를 개교해 배움의 기회를 잃은 노동자·여성·시민·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많은 학생을 배출했다(황우갑, 2001). 그러나 송암회는 1980년대 중반 지역문화운동에 관한 내부인식 차이로 인해 분화(모임터)됐으며 시대정신과는 거리를 둔 비정치적 순수학술문화 단체임을 강조했다.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논쟁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내부의 긴장과 갈등은 시대정신과 대학생 또는 지식인의 책무와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송암회 분화과정에서 예술지상주의에 입각한 문화, 현실초월이나 도피문화라는 비판과 도구성道具性으로서의 문화, 특정이념을 위한 목적의식이 뚜렷한 문화를 반대하는 흐름이 존재했다.
송암회 분화 이후 내부의 역사·철학 관련 세미나는 사라지고 지역 사안에 대해서도 관조하는 입장이 강화된다. 이들은 주로 정기적인 송암예술제를 개최하고 연극공연·시화전·강연회 등을 통해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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