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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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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 독일 선교사 귀츨라프가 충청도 서해안 원산도에 도착해 선교활동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65년 영국 선교사 토마스가 2개월 동안 서해안에 체류하면서 선교활동을 했고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선교활동을 시도했다. 당시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퇴각할 것을 요구했으나 셔어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통상을 요구했다. 양각도에 이르러 좌초해 화공火攻을 받아 배가 불탔고 토마스는 순교했다.25)
우리나라 개신교는 1873년 만주에서 서상륜·백홍준·김진기 등이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를 만나 성서를 번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노력으로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 간행했다. 이해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전교활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자 1884년 9월 미국 장로교의 알렌, 1885년 4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셀러, 스크란톤이 입국해 의료·교육·문화·산업과 관련한 활동을 하면서 선교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26)
개신교는 1886년 언더우드 목사가 의주義州에 우리나라 최초 장로교회를 건립한 데 이어 1887년(고종 24) 9월 다시 서울에서 새문안교회를 창립했다. 이해 10월 감리교 아펜셀러 목사가 정동교회를 창립했고 부산·대구·평양 등지에 개신교 교회가 설립됐다. 1887년 호주 장로교회 데이비스 선교사, 1888년 오링거 목사와 죤스 목사, 1890년 영국 성공회 코오프 주교, 1896년 미국 감리교의 캄벨, 1904년 미국 안식교회, 1907년 성결교회 등 개신교 여러 교파가 들어와 선교활동을 폈다.27)
개신교는 천주교와 달리 비교적 박해를 받지 않고 전도활동을 했다. 이유는 첫째, 개신교는 간접선교방식을 채택했다. 간접선교란 직접적인 교리나 포교를 피하고 의료와 교육 사업을 통해 선교하는 방식이다. 현재 다수의 병원과 학교들이 기독교재단인 이유다. 둘째, 개신교는 서민종교라는 인식과 제국주의 침탈을 방어해주는 종교라는 인식이 지배적 이었다. 선교초기 교회당에는 태극기를 걸어 놓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국권을 상실하자 일제는 우리나라의 종교를 탄압했고 개신교도 탄압을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개신교는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을 배출하는 등 천도교와 함께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수많은 교인들이 희생되거나 감옥살이를 했다.
일제는 대륙침략을 전후해 이른바 황민화皇民化정책을 강행했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교인들이 많은 수난을 겪었다. 1942년 외국선교사 전원을 추방했고, 1943년 성결교회와 안식교회가 폐쇄 당했으며, 1945년 우리나라의 개신교 각 교파를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해 지배했다.28)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교단이 해체되고 개신교는 새롭게 재건해 나갔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남한의 개신교는 또 한 차례 수난을 겪었다. 1953년 휴전되 면서 남한 교회는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전기를 맞았다.







주석

25) 『평택시사』, pp.942~943.
26) 민경배, 『한국의 종교』, 문화공보부, 1989, p.71.
27) 『평택군지』, p.764.
28) 위의 책, pp.764~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