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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의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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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1862년 경기지역 처음으로 접주를 임명한 시기와 연관이 있으나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평택에 동학이 전래된 것은 20년 후인 1880년대 전후다.36)
평택지역의 첫 동학교인은 이민도李敏道다. 1850년 진위군 현덕면 권관리에서 태어나 29세 때인 1879년 동학에 입도했으며 주로 평택 서남부지역과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다. 1905년 수원교구가 설립된 이후에도 이민도는 수원과 평택 외에 광주廣州까지 포교활동을 했다.37)
평택지역 동학의 중요한 인물로 김내현金來鉉이 있다. 김내현은 가선대부, 상호군, 관상감제조 등을 역임한 명문거족 출신이며 1884년 2월경 호남 출신 안교선安敎善38)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39) 김내현은 동학혁명 당시 수원에서 기포했다가 안승관安承寬과 함께 10월 1일 남원벌에서 처형됐다.40) 김내현의 포교로 평택지역에서 민공익과 민재명 부자, 한흥유와 한칠성 부자, 김명수와 김화덕 부자 등이 동학에 입교했다.41) 이민도와 김내현의 포교활동으로 1890년 평택지역 동학세력은 수원지역과 연합해 조직적으로 발전했다.
교세를 확장한 평택과 수원지역 동학은 1892년과 1893년 교조신원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지역 동학도인들은 1894년 동학혁명에도 적극 가담해 동학혁명 이후 한동안 평택지역 동학조직은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퇴했다.
안성 출신 김한식金漢式과 이민도 등의 노력으로 교세가 점차 회복돼 1905년 12월 1일 3대 교조 손병희에 의해 ‘동학’이 ‘천도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천도교중앙총부와 지방교구가 설치되면서 평택지역은 수원교구에 소속됐다. 고덕면과 현덕면에는 수원교구 소속 면전교실이, 그 외 지역은 진위교구가 각각 설립됐다. 당시 진위교구 교구장을 비롯한 임원명단은 ‘천도교회월보’에 나타나 있다.42)
천도교 조직은 훗날 평택지역에서 3·1 운동을 전개하는 기반이 됐다. 천도교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병희가 지방 중진 교역자를 중앙으로 불러 7차에 걸쳐 49일간의 특별수련을 실시했다. 이때 평택지역에서는 이민도가 참여했다.43) 3·1 운동을 전후해 평택지역에는 천도교 조직으로 진위교구와 수원교구 현덕면전교실과 고덕면전교실, 청북면전교실 등 한 개의 교구와 3개의 전교실이 있었다. 즉 평택지역의 동북부는 진위교구, 서남부는 수원교구 관할이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9일 천도교인들은 평택지역에서 현덕면 계두봉과 옥녀봉 등 면내의 산상 봉화시위를 주도했다. 평택지역에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은 서남부의 현덕면, 동북부의 북면이었다. 3·1 운동으로 천도교는 여러 지역 교구들이 폐쇄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천도교는 일제 말기와 해방 후,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급속도로 침체돼 갔다. 특히 남북분단으로 교세의 8할 이상을 점유했던 북한지역 천도교가 몰락하면서 남한의 천도교 는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평택지역 천도교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평택지역에는 1920년대 초반 송탄을 중심으로 교인들이 모여 천도교 신앙공동체를 이뤄갔다. 1962년경부터 천도교송탄전교실을 설립 운영했고, 1991년 송탄교구로 승격돼 유 호빈이 초대 교구장이 됐다. 현재 천도교 송탄교구는 고덕면 당현리에 위치해 있다. 또한 1985년 포승면 홍원1리에 천도교 안중교구가 설립됐다.


주석

36) 조성운, ‘일제하 수원지역 천도교의 성장과 민족운동’, 『경기사론』 4, 2001, pp.183~184.

37) 광주의 대표적인 교인 한순회는 1907년1월14일 이민도의 전교로 동학에 입도했다. 『한순회관내 연원록』, 1942.

38) 안교선은 호남 출신으로 아산에 거주했다. 1883년 최시형이 경주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할 때 윤상오와 같이 有司로 참여했다. 또한 1884년 2월경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동학혁명 당시에는 아산접주로 활약하다가 남원벌에서 성재식, 최재호와 함께 처형됐다.

39) 「수원종리원연혁」, 『천도교회월보』 1926.1, p.29.

40) 『갑오실기』, 갑오년 10월 초1일조. 安承寬은 畿湖大接主로, 金鼎鉉(김내현-필자주)은 畿湖大接司 돼 여러 사람의 알선으로 각지에 신도가 수만에 달했다. 「수원군종리원연혁」, 『천도교회월보』 191호, 1926. 1, p.29.

41)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2,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2007,p.23, pp.48~50, pp.188~190.

42) 「천도교회월보」 제2호(1910년 9월호)부터 제83호(1917년 6월호)까지의 ‘중앙총부휘보’ 참조

43) 『수원군종리원연혁』, p.29.
          조기주, 『동학의 원류』, 보성사, 1979, pp.369~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