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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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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인의 자랑, 평택인의 긍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출범한 ‘민주평택’ 신문은 1990년 8월 1일부터 시작됐다.10) 지역신문의 필요성을 느낀 발행인 이성춘11)과 최해영·안창현 등 젊은이들이 지역을 밝히는 등대로서 지역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자 마음을 한데 모았다.
창간 준비작업 중 1990년 8월 31일에 공보처에 정기간행물 등록신청을 하고 10월 12일 ‘민주평택’으로 제호 등록을 받았다. ‘민주평택신문 창간준비추진위원회’는 9월 10일 합정동 773-11번지 신축건물 2층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11월 창간작업을 진행했다. 지역 연고가 약했던 ‘민주평택’ 신문은 초대 명예회장으로 평통자문위원인 정진모를 추대했다.
10월 25일 ‘민주평택’ 신문 준비호 1만 부를 발행해 평택시 전역에 7천 부, 안중·팽성 등 평택군에 1천 부, 송탄시에 1천 부, 안성군에 1천 부를 배포해 창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990년 11월 21일 ‘민주평택’ 신문을 창간하고 다음날인 11월 22일 평택농민회관에서 ‘민주평택’신문 창간 리셉션을 준비했다. 평택지역에서는 ‘평택신문12)’에 이어 두 번째 지역신문이 됐다.
창간 당시 ‘민주평택’ 신문의 주요 편집방침은 보편화·대중화된 중앙지와의 차별과 독특한 특성을 갖기 위해 지역사회 관련 정보 제공에 역점을 두었다. 또 지역사회에서 발생할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주민간의 이해관계를 절충·조정하고 대립을 완화시켜 주민들의 향토애를 끌어내는 한편 지역사회에 대해 ‘우리는 하나’라는 연대감을 형성시켜 지역주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화합적 통합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지역발전을 위한 여러 문제들을 적극 발굴해 각자의 입장을 게재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쟁점을 공개해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으로 ‘주민 토론의 광장’을 제공했다. 평택시·군과 생활권이 같은 송탄시와 안성군 등 인근 지역과의 유기적 관계를 계속적으로 모색해 나감으로 평택사회가 경기남부권의 새로운 중심권으로 부상되도록 하는 한편 우리민족 구성원 전체가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을 갖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런 편집 방침 아래 지역신문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갖기 위해 ‘민주평택’ 신문은 제작 측면에서도 혁신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이는 지역의 개념을 광역화하기 위해 독창적 기획 과 아이디어 창출로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한 심층 기획 기사를 강화해 나가는 한편 독자의 시선을 한눈에 모을 수 있는 새로운 편집기법으로 각 지면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준다는 방침으로 편집했다.
‘민주평택’ 신문은 신문사 자체 또는 후원을 통해 각종 사업과 행사를 추진했다. 1991년 2월 ‘지방자치와 평택발전 심포지엄’ 개최, 5월 ‘서울신포니에타 초청연주회’, 1991년 11월 ‘코리아엔젤스 특별초청공연’, 1992년 4월 ‘공옥진 1인 창무극 공연’을 마련하는 등 공연과 각종 행사를 주기적으로 개최해 지역사회와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민주평택’ 신문은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대 정진모 명예회장에 이어 1991년 7월 김병국을 회장에 추대하고 신문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기 위해 1991년 8월 19일부터 지역 주민 대상으로 주식을 공모했다. 11월 8일 발기인 모임이 있었다. 1991년 11월 6일 합정동 사무실에서 평택동 66-9호로 이전하고 11월 21일 창간 1주년 기념호를 발행해 창간 후 1년간 매주 1회씩 모두 45호의 신문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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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0) ‘민주평택’ 신문 제2호 2면, 민주평택신문사, 1990년 11월 28일.
11) 이성춘은 ‘종교신문’ 취재부 기자를 시작으로 ‘제일경제신문’ 편집부 차장을 역임하고 ‘민주평택’과 ‘평송신문’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지역 언론에 기여해왔다.
12) ‘평택신문’은 당시 ‘우리평택’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