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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지명유래 > 동洞지역(2)
■ 동洞지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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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동原平洞


1905년 1월 1일 경부선철도 개통으로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옆 앞에 형성된 마을. 일제강점기에는 평택리라고 했다가 1986년 평택시 승격과 함께 서부동으로 편제됐다. 1992년 6월 원평동으로 고쳤다.



• 본정통本町通 : 일제강점기 평택역 앞에 형성된 중심거리. 일본어로 ‘혼마찌’라고 하며 ‘한 도시의 중심이 되는
     거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했으며 일본인 주택·상가·창고 등이 밀집했다.

• 평택역광장 : 원평동 옛 평택역 입구에 조성된 광장.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집회와 운동회가 열렸다.

• 평택장 : 일제강점기 원평동에 형성된 조선인 시장. 평화병원에서 옛 군청 사이에 있었고 싸전거리가 유명했다.

• 1등도로 : 평택역 앞 동쪽에서 서쪽으로 연결된 옛 국도1호선. 도로 좌우에 상업은행 평택지점·금융조합·정거장·
     읍사무소 등이 있었다.

• 용잔 : 일제가 경부선 철도건설을 하고 남은 철도부지. 철로 옆에 있고 면적이 넓어서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운동회가
     열렸다.

• 평택우시장 : 일제강점기 평택초등학교 터에 있었던 소 매매시장. 한국전쟁 뒤 평택장이 통복동으로 옮겨가면서
     우시장도 함께 이전했다.



통복동通伏洞


조선시대 진위군 병파면 지역. 통복천 갯가에 위치해 ‘통복개’, 통복천에 보를 축조하고 주변에 마을이 형성돼 ‘통복보’라고도 불렀다. 한국전쟁 뒤 도시가 철도 동쪽으로 옮겨가면서 현재 통복시장 일대까지 확대됐다.



• 원통복元通伏 : 통복동의 본 마을이다. 진위군 병파면에 속해 ‘상통복’ 또는 ‘윗마을’이라고도 했다.

• 하통복下通伏 : 원통복의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 진위군 성남면에 속해 ‘아래통복’이라고도 했다.

• 신덕리新德里 : 조선시대 충청도 평택현 지역으로 신덕포가 있던 포구마을. 원평동 제방 너머에 마을이 형성돼
    ‘뚝너머’라고도 불렀다.

• 고평高坪 : 통복 육교 서쪽에 위치한 마을. 지대가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돼 ‘높은들’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고평’이라고 했다.

• 창월倉越 : 조선시대 순화군의 궁방전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 너머에 있던 마을. 안성천 제방공사로
     폐동됐다.

• 화촌華村 : 안성천변의 포구마을. 아산만 일대의 상선과 고깃배들이 드나들고 상거래가 이뤄지던 포구로 홰나무가
     무성해 유래됐다.

• 낙촌樂村 : 옛 통복시장 우시장에서 통복동 북동쪽까지 형성된 마을. 1960년대만 해도 옹기점이 있어 ‘점촌’
     이라고도 했다.

• 통복시장 :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을 받아 원평동과 평택장이 파괴되면서 1953년 삼거리 동북쪽에 새로 조성된
     시장. 1950∼60년대에는 싸전(미곡시장)과 우시장이 유명 했으며 지금은 채소전·생선전 등을 중심으로
     명성을 잇고 있다.

• 동삼거리東三巨里 : 통복시장 동북쪽 옛 우시장 근처. 평택시가지가 동쪽으로 넘어오기전 평택-안성 간 국도 38호선
     과 평택-원곡 간 신작로가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통복시장 내 가축시장이 형성돼 속칭 ‘개전로터리’
     라고도 부른다.

• 서삼거리西三巨里 : 일제강점기 경부선 평택역에 설치되고 국도1호선과 국도38호선이 건설되면서, 1호선과
     38호선이 교차하는 삼거리가 형성돼 유래됐다. 일제강점기 삼거리 주막이 있었으며, 한국전쟁 뒤 평택장이
     통복동으로 넘어온 뒤에는 시장로터리라고 부른다.

• 통복지하도 : 본래 철도건널목이 있던 자리라 ‘땡땡거리’라고 했지만 1980년대 초 지하 차도가 건설됐다.

• 통복천 : 안성천의 지류. 천덕산에서 안성시 원곡면을 거쳐 통복동과 세교동 사이를 흐른다.



평택동平澤洞


경부선 평택역 앞에 형성된 평택리가 시작이다. 평택리는 한국전쟁 이후 시가지 중심이철로 동쪽으로 옮긴 뒤 중부출장소는 평택1·2·3리, 서부출장소는 4·5·6·7리를 관할 하게 했다. 1986년 평택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1·2·3리는 평택동이 됐고, 4·5·6·7리는 서부동이 됐다. 평택동은 구 평택시의 번화가로 평택역과 공공기관, 상가와 식당들이 밀집했고, 각종 관광 위락시설이 집중돼 있었다.



• 평택역 :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설치된 기차역.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돼 종전
     뒤 철로 동쪽(평택동)으로 옮겼다. 2009년 민자역사가 건축되고 역 구내에 AK플라자 평택점(애경백화점)이
     입주했다.

• 새시장 : 평택읍 시절 평택1리 지역. 1963년 평택읍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통복시장 이전을 추진하기 위해 새시장
     조성공사를 시작했다가 중단한 마을이다. 지금은 식당들이 밀집하고 평택지역 대표음식인 폐계닭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많아서 먹자골목 또는 폐계닭골목으로 부른다.

• 명동골목 : 평택읍시절 평택2리 지역. 1953년경 시가지의 중심이 철도 동쪽으로 옮긴 뒤 식당과 술집·상가들이
     밀집한 최고의 번화가다.

• JC공원 : 평택이 한국청년회의소(한국JC)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한국JC는 주한미제5공군
     정훈장교 메닝스포츠우드 중위에게 소개받은 평택지역 12명의 젊은이들이 서정빈을 중심으로 1951년 12월 23일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1952년 2월 ‘평택청년애향사업회’가 조직됐고 점차 확산이 돼 ‘한국청년회의소’가 설립됐다.

• 3리 : 평택역 주변지역으로 평택읍 시절 평택3리에 속한 마을. 사창가가 모여 있고 속칭 ‘쌈니’라고 부른다.



비전동碑前洞


비전1동·동삭동·죽백동·청룡동·월곡동·동삭동 일부지역과 비전2동 소사동·용이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며 비전1·2동을 관할하는 법정동. 조선시대 진위현 병파면 지역이었고 1914년 병남면으로 통합됐다. 조선후기 큰길가에 비석이 있어 ‘비석거리’ 또는 ‘비전碑前’이라고 부르면서 유래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어인남리·산직촌·양성군 구룡동면 창리·서재곡의 일부를 병합해 병남면 비전리라 했다. 1986년 평택시로 승격되면서 비전동이 됐고, 도시 발전에 따라 비전1·2동으로 분할됐다.



• 어인남리 : 비전2동 관할의 자연마을. 덕동산 동쪽에 위치했으며 조선후기에는 ‘남리南里’라고 불렀고 지금은
    ‘어인남리’ 또는 ‘어린내미’라고 부른다. 양성 이씨와 순흥 안씨가 많이 거주하며 일제강점기 계인조합이 조직돼
     ‘계인’이라고도 부른다.

• 자란紫蘭 : 비전1동 관할의 자연마을. 본래 원곡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어서 ‘재랭이’, ‘당재’라고 부르다가
     2000년 경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자란’으로 고쳤다. 무속인들이 많이 거주해 ‘당골’이라고도 한다.

• 은성銀城 : 자란마을 고갯마루의 이름. 평택천주교회 평택성당 뒤에 1,3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정’ 또는
    ‘은성’이라고 했다.

• 산직촌山直村 : 소사벌택지지구 안에 있었던 자연마을. 주변지역에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과수농장을 중심으로
  배 과수농업이 발달해 ‘이곡梨谷’ 또는 ‘배나무골’이라고도 불렀다. 2008년 전후 소사벌택지지구 조성으로 폐동됐다.

• 문화촌文化村 : 본래 세집 매였는데 한국 전쟁 뒤 피난민들이 정착해 피난민촌이라고 부르다가 문화촌으로 바꿔
     불렀다. 문화촌 남동쪽 지역은 1960년대 전후 전라도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전라도촌’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 상신작로上新作路 : 평택여중사거리에서 한전 평택지사 사이 도로 변에 형성된 마을. 옛국도 38호선 변 신작로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 하신작로 : 옛 국도 38호선 평택여중 사거리에서 성동초등학교 사이의 신작로에 형성된 마을.

• 낙촌 : 삼각산 뒤쪽에 형성된 마을. ‘낭떠러지기’라고도 부른다. 본래 천주교인들이 운영하는 옹기점이 있었고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가 1990년 택지개발에 따라 단독주택단지가 조성됐다.

• 삼각산 : 자란마을 뒷산. ‘자란산’ 또는 ‘재랭이산’으로도 부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란마을의 제당이 있었다.

• 덕동산 : 1978년 4월 충혼탑이 건립돼 ‘충혼산’ 또는 ‘탑산’이라고 부르다가 1986년 평택시 승격을 기념해 산
     정상에 덕동루를 세우면서 ‘덕동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매봉 : 신한중고등학교 뒷산. ‘응봉산’이라고도 한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고적조사 자료에는 ‘용봉산’ 또는 ‘매봉산 ’
     이라고도 기록됐다. 기우단이 있어 신성하게 여겼다.

• 배다리저수지 : 소사벌택지지구 안에 있는 저수지.

• 부처지골 : 덕동산 동북쪽 골짜기. 전통사찰 명법사가 있다.



합정동蛤井洞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 지역. 1914년 합정리·조산리·야미리·양성군 구룡동면 창리·서제곡·야미리 각 일부를 통합해 합정리(동)라고 했다. 굿모닝병원·소사벌레포츠타 운·청소년문화센터·롯데마트 평택점·평택고등학교 등이 있다.



• 조개터 : 합정동의 본래 이름. 소사천과 백랑천이 가까이 흘러 바닷물이 드나들 때는 말조개, 부전조개(재첩)를
     잡았다고 해서 유래됐다. ‘합기蛤基’ 또는 ‘합정’이라고도 부른다.

• 통미 : 합정동 주공3단지아파트 북쪽 마을. 1905년 경부선철도 건설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뒤
     다양한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 배미 : ‘야미夜味’라고도 부른다. 하천방향으로 돌출된 조산자락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루가 있는 마을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 됫박산 : 합정동 주공3단지 안에 있었던 해발 10.2m 높이의 산. 됫박산 마을과 마을제당이 있었지만 1990년경
     아파트공사로 사라졌다.

• 창말 : 롯데마트와 합정감리교회 자리에 있었던 마을. 조선후기 양성현의 사창육고 가운데 하나가 있었다.

• 소금장고개 : 조개터에서 조산을 넘어가는 고개. 소금장수들이 넘나들었다고 한다.

• 조산 : 소사벌레포츠타운과 배미 사이에 있는 산

• 소사벌레포츠타운 : 1978년 조개터와 배미 사이 평택종합운동장으로 신설된 스포츠타운. 종합운동장·축구장·
     농구장·수영장·인라인스케이트장 등을 갖추고 있다.



세교동細橋洞


진위군 병남면 지역으로 통복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있어 ‘세교’ 또는 ‘잔다리’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은실리를 통합해 병남면 세교리라 했다.



• 안잔다리 : 잔다리의 중심마을. 잔다리에서도 안쪽에 위치해 안잔다리 또는 윗동네라고 불렀다.

• 벌잔다리 : 잔다리에서 동쪽 벌판 쪽으로 나앉은 마을. 아래잔다리 또는 아랫동네라고도 불렀다. 1990년대 초
     세교지구 택지개발공사로 폐동됐다.

• 새말 : 통복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 막일하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형성한 마을. 1990년대 초 세교지구 택지
     개발로 폐동됐다.

• 신촌 : 경동보일러 건너편 마을. 일제강점기에는 뽕나무밭이었다가 한국전쟁 때 피난민정착사업소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 은실 : 중앙초등학교 일대 마을.

• 큰은실 : 은실마을에서 큰 마을.

• 작은은실 : 중앙초등학교 좌측 모퉁이 마을. 돌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돼 ‘산아래’라고도 부른다. 은실에서 작은
     마을이었다.

• 은곡 : 은실 안쪽 움푹 패인 계곡. ‘음곡’이라고도 한다. 금녕 김씨가 처음 입향한 곳이다

• 동산아래 : ‘산밑창’이라고도 부른다. 상공회의소 뒤편에 있는 마을로 작은 구릉 아래에 마을이 형성됐다.

• 봉학골 : 1980년대 초 옹기굽던 정석헌 씨가 택지를 조성하고 주민들을 입주시키면서 형성된 마을.

• 신흥 : 봉학골 천주교 공동묘지에 자리 잡은 마을. 처음에는 천주교 교우촌으로 개발되다가 1990년대 초 낙촌
     지역이 택지개발 되면서 나머지 주민들이 이주해 형성한 마을.

• 번개방죽 : 안잔다리에 있었던 방죽. 모내기를 할 때 잔다리 일대에 물을 공급했다.

• 당산 : 은실마을 뒤쪽의 산. 은실마을 제당이 있으며 밭농사지대로 개발됐다.



군문동軍門洞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평택현에 속했다가 갑오개혁 뒤 진위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간포리를 합쳐 군문리라 했다.



• 군문포 : 군문교 아래에 있었던 포구. 1894년 이전까지는 ‘군물포’라고 했다가 청일전쟁때 청나라 군사가 주둔
     하면서 군문포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평택현 군물진리였고, 갑오개혁 뒤 진위군 병파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진위군 병남면 군문동이 됐다. 근대전후에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건너가는 안성천 나루였고, 근대
     이후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군문교가 놓이고 국도 45호선이 가설되면서 평택장과 아산만 일대의 소금과 해산물을
     연결하는 통로가 됐다.

• 간포 : ‘샛개’라고도 한다. 군문1동에서 유천동으로 건너하는 지하차도 부근에 있던 포구 마을인데 수해를 입어
     주민들은 이동하고 마을은 폐동됐다.

• 군문교 : 일제강점기 초 국도 45호선이 가설되면서 목교木橋로 놓였다가 1930년 평택지역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로
     바꿨다. 본래 평택교라고 했으며 해방 후 군문교로 바꿨다.

• 망근다리 : 안성천을 건너는 경부선 철교.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대의 망군대(망루)가 있던 곳에 철교가 놓이면서
    ‘망군다리’라고 했던 것을 음이 변해 망근다리가 됐다.



동삭동東朔洞


고려시대 영신현의 중심이었다. 조선 세종 13년(1431) 진위현에 통합돼 여방면에 속했다. 1914년 서재·모산골을 통합해 동삭리라고 했다.



• 영신永新 : 조선 세종 13년(1431) 까지 영신현의 읍치. 동삭·동촌(가운데말)·대촌(큰말)로 나뉜다.

• 원동삭 : 옛 영신현의 읍치邑治가 있었던 마을. 영신의 동쪽에 위치했다.

• 동촌東村 : 동삭 마을의 동쪽에 있는 마을.

• 대촌大村 : ‘큰말’이라고도 한다. 진주 유씨들이 많이 거주한다.

• 기루지 : 영신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10여 호가 모여 산다.

• 모산골 : 동삭동의 자연마을. 억새가 많이 자라서 유래됐다.

• 모산골저수지 : 모산골 남동쪽에 있는 저수지.

• 상서재 : 조선 정종의 아들 덕천군德泉君이 개척했다고 전해지는 마을. 덕천군이 마을을 개척한 뒤 서당을 짓고
     학문을 가르치면서 서재書齋로 불렸는데 나중에 한자가 바뀌어 서재西才라고 했다. 서재지구 택지개발로 2009년
     폐동됐다.

• 하서재 : 상서재 아래쪽의 마을. 통복천 변에 위치했고 2009년 상서재와 함께 폐동됐다.

• 당재 : 서재마을 마을제당을 넘어가는 고개. 서재와 칠원동 원칠원을 연결했다.

• 두리봉 : 동삭동 원동삭마을 동쪽 봉우리. 고려시대 영신현의 주산이었다.

•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 1996년 9월1일 동삭동 152-3번지에 개소. 수원지방검찰청 평택지청과 함께 있으며
     평택시와 안성시를 관장한다.



지제동芝制洞


조선후기 진위현 성남면이었다. 1914년 성남면 지제리·울성리, 오타면 울성리, 여방면 영신리 각 일부를 통합해 지제리라 했다. 고갯마루에 마을이 형성돼 ‘뒤재’라고 했던 것을 음이 변해 지제가 됐다고 한다.



• 구대舊垈 : 지제동의 자연마을. 500여 년 전 단양 우씨가 터를 잡았고 나중에 연안 차씨가 입향해 마을을 이루었다.

• 당현 : 구대에서 여염리 방면으로 넘어가는 산마루에 서낭당이 있어 당고개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당현이라고 함.
     당재말이라고도 하며 지제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 우물말 : 당현의 자연마을. 공동우물이 있다.

• 북우물 : 당현 북쪽의 우물가에 형성된 마을. 계곡 사이에서 건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어 허드렛물로 사용했다.

• 울성 : 성종의 14남 웅천군파와 15남 양원군파가 개척한 전주 이씨 동족마을이다. 고덕면 방축리성과 태미
     산성의 울안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 새터 : 구대마을 북동쪽에 형성된 마을.

• 태미산 : 당현과 울성 사이에 있는 산. 도일천 방면으로 불룩하게 솟았고 고려시대에 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 울성저수지 : 울성마을 뒤쪽에 있는 저수지. 옛 문헌에는 도일천 변에도 울성보가 있었다고 한다.

• 봉골저수지 : 당현마을 북쪽 골짜기에 있는 저수지. 2013년 삼성전자 평택사업장 안에 포함됐다.

• 지제역 : 2006년에 개통한 서울-천안(신창) 간 노선 전철역.



신대동新垈洞


조선시대 진위현 성남면 지역. 안성천 갯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어서 ‘새터’라고 했던 것을 ‘신대新垈’로 표기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성남면 고잔리, 신대리, 오타면 삽교리를 통합해 신대리(동)라고 했다.



• 새터(말) : 신대리의 중심마을. 조선후기 안성천 갯가에 새로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원신대라고도 한다.

• 삽교 : 신대교를 가설하기 전에는 섶다리를 놓고 도일천을 건너다녀서 유래됐다. 옛날에 포구가 있었다.

• 고잔 :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시절 곶串이 형성된 곳에 포구와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마을에 고잔포가 있었다.

• 고잔교 : 고잔마을 입구에 1958년에 가설한 다리

• 서바탱이 : 번개들 서쪽 끝에 새로 형성된 마을. ‘신설촌新設村’ 또는 ‘석바랑’이라고도 부른다. 평택상공회의소
     등이 있다.

• 신대레포츠공원 : 2002년 개장한 35,000㎡ 넓이의 레포츠공원. 축구장·야구장·테니스장·궁도장·어린이놀이터
     등이 갖춰져 있다.



소사동素沙洞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소사리에 송전·자기촌·동역리·서재곡을 통합해 안성군 공도면 소사리(동)라 했다. 1983년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됐 다. 소사素沙라는 지명은 소사벌이 흰모래밭이었기 때문에 유래됐다.



• 원소사 : 소사1동의 자연마을. 경기도의 관문이었던 소사원이 있었고, 소사동대동법시행기념비와 소사장이 있었다.

• 서재곡 : 소사2동의 자연마을. ‘서지골’ 또는 ‘쇠죽골’이라고도 부른다. 양성현의 사창육고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세곡을 싣고 합정동 창말의 조창으로 가던 도중에 소에게 여물을 먹였던 데서 유래됐다.

• 동역말 : 소사동의 옛마을. 현재는 마을 터만 남았다.

• 송전 : 소사3동의 자연마을. 소나무가 우거져 ‘솔밭말’이라고도 한다. 동방학교가 있다.

• 자기촌 : 솔밭말 옆 마을.

• 소사벌 : 소사동 남쪽 소사천에서 안성천 사이의 벌판 이름. 평택평야의 곡창지대이면서 들판 가운데로 삼남대로가
     지나갔다.

• 소사벌대첩 : 조선 1597년(선조 30) 9월 5일에 소사벌에서 있었던 명나라 군대와 왜군 사이의 전투. 정유재란으로
     재침한 왜군이 진주성과 남원성을 함락하고 삼남대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해생·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
     파귀頗貴가 이끄는 명나라 기병에게 대패한 전투.

• 소사원 : 조선시대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소사1동에 설치한 국영 주막. 조선후기에 폐원됐다.

• 소사천 : 안성천의 지류로 소사동 남쪽을 흘러가는 하천.

• 대동법시행기념비 : 조선 효종 때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金堉(1580-1658)의 공덕을 기려 충청도
     백성들이 세운 시혜비. 본래 소사원 옆에 있던 것을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 당산 : 소사1동 뒷산. 할아버지 당목과 할머니당인 미륵당이 있다.

• 북내리고개 : 소사1동 위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 소사동미륵 : 소사1동 옛 소사원 옆에 있는 마을미륵.

• 소사장(터) : 조선후기에 형성된 장시. 매월 5일과 10일에 개시開市하다가 평택장과 개시일이 겹치면서 1920년대
     폐장됐다.



용이동龍耳洞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 백운산에서 뻗어 내린 산맥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동쪽은 용머리 형상으로 안성군 공도면 용두리를 이루고, 서쪽은 용의 귀 언저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용이龍耳라고 했다. 1914년 현촌과 양성군 도일면의 신흥을 통합해 용이리라고 했다. 1983년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됐다.



• 구룡동九龍洞 : 백운산으로부터 산맥이 동남향으로 뻗어내려 느름골·배오개골·신선골·오른가리골·미나올골·옥골·
     소사물골·자바사리골 등 아홉 골짜기를 도는데 아홉 마리의 용이 용트림을 하는 형국이라 해서 유래됐다.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의 중심마을이다.

• 현촌玄村 : 본래 달성 서씨가 거주해 서촌이라고 하다가 연주 현씨가 대성大姓을 이루면서 현촌으로 바뀌었다.
     2012년 용죽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폐동됐다.

• 신흥新興 : 조선후기 양성현 도일면에 속했다. 본래는 마을 남동쪽 쑥밧갓(평안교회 일대)에 마을이 있었지만
     도둑이 많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 왕자봉(방) : 구룡동 뒤쪽의 산봉우리. 옛날 왕이 지나가다가 쉬어갔다고 해서 유래됐다.

• 신흥리고개 : 고룽동에서 신흥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 오룡굴 : 현촌 동쪽의 골짜기. 오룡가리라고도 했다.

• 선가자리 : 배다리저수지 위쪽으로 옛날 배가 들어왔던 나루터.

• 배오개 : 신흥마을 서북쪽에 길게 형성된 골짜기.



죽백동竹柏洞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지역.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침교리, 내촌을 통합해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라 했다. 1983년 평택시로 편입됐다. 죽백3동이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고개여서 ‘재빼기’라고 했다가 음이 비슷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유래됐다.



• 방아다리 : 죽백1동의 마을이름으로 ‘침교砧橋’라고도 쓴다. 마을 앞 청룡천에 방아공이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유래됐다.

• 내촌: 방아다리의 안쪽에 형성된 마을로 ‘안골’이라고도 부른다.

• 재빼기 : 죽백3동의 마을.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 해당돼 ‘재빼기’ 또는 ‘북백’이라고 했다.

• 대문재 : 재빼기 입구에 해당한다. 옛날에는 하마비가 있어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넘어 갔다고 한다.

• 산장너머 : 방아다리 서쪽 마을로 산장모퉁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산장이 있었다.

• 속뜸 : 방아다리 안쪽마을로 ‘속두모퉁이’라고도 한다.

• 강당말 : 죽백초등학교 주변 마을. 글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 수여지 : 강당말 앞쪽의 논. 모를 심고도 물이 남아서 유래됐다.

• 꽃밭재 : 강당말에서 용이동 신흥마을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

• 골품고개 : 내촌에서 재빼기로 넘어가는 고개.

• 삼태봉 : 내촌 뒷산으로 모양이 삼태기처럼 생겼다.

• 가내 :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으로 통복천 냇가에 위치해 ‘가내’라고 했다. 근대전후에는 가내주막이 있었다.



월곡동月谷洞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지역. 1914년 원구리에 관동을 통합해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라고 했다. 월곡1동 뒤에 망월대望月臺가 있어 유래됐다.



• 달곡 : 월곡동의 우리말 이름. ‘달구리’라고도 한다.

• 관동官洞 : 월곡2동의 자연마을. 옛날 관아가 있어 관동, 귀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귀골’, ‘구골’이라고도 불렀다.
     마을 안에 골밭·향교동·옥터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 새터말 : 새로 형성된 마을.

• 망우재 : 월곡1동 뒷산으로 망월대가 있어 ‘망운대’ 또는 ‘망우재’라고 했다.

• 백운산 : 월곡동과 안성시 양성면 반제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큰산고개’라고도 한다. 정월 초하루에 월곡1동
     마을에서 해돋이 행사를 한다.

• 전의 이씨 효부 정문 : 월곡1동 월구리와 2동 관동 사이에 있는 조한기의 처 전의 이씨 효부 정문. 1705년에
     정려됐다.

• 아래골 : 월곡2동 마을 앞의 골짜기.

• 요골 : 월곡2동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



청룡동靑龍洞


조선시대 양성현 반곡면 지역. 1914년 안성군 원곡면 청룡리가 됐다. 1983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됐다. 예로부터 백운산은 용의 머리이고 남쪽으로 갈라진 산줄기는 용과 같았는데, 청룡동은 백운산의 용이 푸른 하늘로 승천한 형국이라 해서 유래됐다.



• 뱃머리 : 옛날 조일농원 앞 통복천으로 바닷물이 들어올 때 배가 닿았던 곳.

• 뒷번데기 : 청룡동과 수촌 사이의 들판.

• 방죽말 : 청룡동 남쪽의 논농사지대.

• 쇠뎅이 : 청룡동의 주산.

• 정승골 : 옛날 정승의 무덤이 있던 곳. ‘정성골’이라고도 부른다.

• 가골·새초골·찬샘골 : 청룡동의 골짜기.



유천동柳川洞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과 양성현 영통면 지역. 1914년 상유천리·하유천리·양성군 구룡면 소사리·동역리 일부를 통합해 병남면 유천리라고 했다. 유천리라는 지명은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버드내’라고 했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 양성버드내 : 유천1동의 자연마을. 1914년 이전에는 양성군에 속해 유래됐다.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성천 변에서 사금을 많이 채취해 ‘사그막 동네’라고도 불렀다.

• 진위버드내 : 유천2동의 자연마을. 진위현에 속해 유래됐다. ‘본유천’ 또는 ‘버드내’라고도 부른다.

• 직산말 : 유천3동의 자연마을. 조선후기 직산현에 속해 유래됐다.

• 새말 : 유천3동에서 가장 큰 마을.

• 황룡동 : 유천3동의 자연마을.

• 유천교 : 국도 1호선 유천동 부근 안성천을 건너는 콘크리트 다리. ‘흰다리’라고도 불렀다

• 안터 : 유천1동과 2동 사이에 있었던 마을. 버드나무가 100여 그루 있었지만 화재가 빈번하면서 폐동됐다.

• 앞뜨미·뜨뜨미 : 유천1동의 자연마을 이름.

• 십한구덩이 : 유천1동 동쪽 400m 지점에 있는 물웅덩이.

• 새마답 : 유천1동 하천 변의 지명. 풀과 갈대가 많아서 쇠풀을 뜯기가 좋았다.

• 사천배기 : 유천1동에서 2동으로 넘어 가는 굴다리 부근 지명. 커다란 말 무덤이 있었다. 청일전쟁 때 전사한 일본군
     4천 1백 명의 무덤 또는 옛날 말을 타고 싸우다가 전사한 장군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김해규_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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