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육로교통 > 유적과 유물

본문 바로가기
유적과 유물>교통 · 통신유적>육로교통의 역사>조선후기 육로교통
■ 조선후기 육로교통

본문


조선후기 지리지 가운데 신경준의 『도로고』는 교통로에 관한 괄목할 만한 저작이다. 신 경준은 8도를 6대로大路로 나누었는데, 평택지역으로는 제5로인 제주로가 지났다고 했 다. 제주로는 한양에서 출발해 수원-천안-공주-삼례-정읍-해남-제주까지 가는 노선으 로, 평택지역에는 오산신점에서 청호역-진위-갈원-소사점-아주교를 건너 성환역으로 넘어갔다.16)
정상기의 『동국지도』17)에는 전국의 도로망을 7대로로 분류하면서 신경준의 5대로(제주 로)를 통영로(제5대로)와 제주로(제6대로)로 구분했다. 여기에서 통영로는 한양에서 과 천-수원-진위를 지나 천안-공주-전주-남원-함양-산청-진주-통영까지 연결된 도로 로, 함양, 산청길을 제외하고는 삼남대로 노선과 거의 일치한다.
『증보문헌비고』는 1770년(영조 46) 홍봉한 등이 왕명으로 제작한 『동국문헌비고』를 1903년~1908년 사이 황제의 칙령으로 다시 편찬한 지리서다. 이 책은 조선후기의 대로 를 9개 간선로로 구분했는데, 삼남대로는 제6로, 충청수영로는 제8로로 구분했다. 이것은 1866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의 구분과도 일치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제6 로는 한양-수원-청호역-진위-소사-성환역으로 연결됐고, 충청수영로는 갈원을 지나 소 사에서 분기해 평택(현 팽성읍)-독천(팽성읍 석근리)-요로원을 거쳐 충청도 보령의 충청 수영까지 연결됐다.18)
『대동지지』와 『증보문헌비고』에서 밝힌 삼남대로(제6로)는 춘향전에도 언급된다. 춘향전 에는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전라도 암행어사에 제수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내려가는 노정 路程에, “부모전 하직하고 전라도로 향할 새…동젹이를 얼풋 건네 남태령을 넘어 과천읍에 서 중화하고, 사그네 미럭당이 수원 숙소하고, 대함교, 떡전거리, 전개올, 중밋, 진위읍에서 중화하고, 칠원, 소새, 애교다리, 성환역에서 숙소하고19)…(중략)”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김정호가 『대동지지』에서 말했던 6대로(삼남대로)와 일치한다.
평택지역의 대로大路는 19세기를 전후해 변화를 겪었다. 1757년(영조 33)~1765년(영조 41) 사이에 편찬한 여지도서에는 삼남대로 평택구간에 큰 변화가 없었지만 1843년과 1899년 편찬된 『진위현읍지』, 『진위군읍지』 등에는 기존의 도로에 있었던 역원들이 폐원閉院됐고,20) 여러 개의 주막들이 원院의 역할을 대신했으며, 진위면 신리의 장호원이 주요 간선도로망에서 제외된 것으로 나타난다.21)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지됐던 진위면 신리 장호원 노선이 없어지고, 19세기 이후 진위면 봉남리(진위주막)→마산2리(신제점)→소백치→대백치→갈원이라는 새로운 노선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내용으로 19세기 삼남대로 평택구간을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오산신점 → 평택시 진위면 청호리(청호주막) → 진위면 가곡리 → 진위면 견산리 산직촌(밖술막) → 진위면 봉남리(진위주막, 진위장) → 진위면 마산2리(새뚝거리주막 또는 신제점) → 소백치(작은흰치고개 또는 염봉재), 동막(우곡점) → 대백치(큰흰치고개) → 장안동(감주거리주막) → 원도일 → 칠원1동(갈원 주막) → 죽백3동 가내(가내주막) → 죽백3동 재빼기 → 배다리 저수지 → 소사1동(소사원) → 유천1동 양성 유천 → 안성천(아교, 아주교) → 성환읍 안궁리 가룡마을 → 대홍리 홍경원



주석

16) 한국도로공사, 『한국 도로사』, 1981년, p.102.
17) 이찬, 『한국의 고지도』, 범우사, 1997.
18) 한국도로공사, 앞의 책.
19)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춘향전』Ⅵ.
20) 『진위현 읍지』, 1843.
21) 『진위군 읍지 성책』, 1899, 이곳에는 진위현에 청호점·견산점·신제점·우곡점·갈원점·통복점이 운영 중이라고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