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현의 해창海倉 옹포瓮浦 > 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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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의 해창海倉 옹포瓮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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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현의 해창海倉 옹포瓮浦


위 치 : 청북면 삼계2리 옹포



옹 포瓮浦는 고려시대 감미부곡이었고, 조선 초 양성현에 편입돼 감미동면으로 편제됐다. 19세기 전반 청구도(1834)에는 ‘저포’라고도 기록됐고, ‘독개’ 또는 ‘양성독개’라고도 불렀다.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 『양성군읍지』36)에 따르면 옹포에서 담당하던 조세는 포면세浦面稅와 대동미大同米였고, 취급량은 총 16,989석 내외였다. 본래 이곳에 창고 4개가 있었다. 갑오개혁 뒤에 조세가 금납화되는 과정에서 2개로 줄었다.
옹포에서는 세곡稅穀뿐 아니라 포구상업도 활발했다. 나루에는 객주와 여각이 있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우궁에서 포세浦稅와 선세船稅를 징수했다.



『수원부선세혁파성책』37)에 따르면, 옹포에서는 청어 1동마다 7전, 조기 1동마다 6전, 갈치 1동마다 1냥, 큰미역 1동마다 1냥 5전, 중크기 미역 1동마다 1냥, 고등어 1동마다 1냥, 북어 1태마다 1냥, 혹어 1속마다 1전 5푼, 전복 1속마다 1전, 꼴뚜기 1급마다 4전, 진어 1속마다 1전(중략)…쌀 1섬마다 3전, 백화염 1항아리마다 2전 5푼, 잡염 1항아리마다 2전 5푼, 문어 1첩마다 2전, 백목 1동마다 5전, 장목 1태마다 5푼, 소금 1섬마다 1전, 소가죽 1칭마다 2냥, 돈 500냥을 1년 포세浦稅로 주인主人이 거둬갔는데, 1884년(고종 21)부터는 해방영에서 거둬갔다.



일제강점기에 옹포 앞으로 장둑이 축조되고 동척농장들이 간척되면서 옹포는 소작료나 공출미를 반출하는 포구가 됐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벼 2백 섬을 실은 배들이 인천 도정공장으로부터 들어와서 벼를 실어갔다.38) 해방 후 장둑 아래까지 간척되면서 포구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 양성현의 해창 청북면 삼계리 옹포(2008) |


주석

36) 『양성군 읍지』, 1899.
37) 『수원부선세혁파성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1886.
38) 최춘일, 『경기만의 갯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