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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교통 · 통신유적>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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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문포軍門浦


위 치 : 군문1동



군문동에 있었던 포구로 조선시대에 충청도 평택현에 속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택현 조에도 있어 조선전기부터 있었다. 군문포의 본래 이름은 군물진이다. 위치는 군문교 아래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이었다.
군물진은 조선후기 충청수영로(6대로)43)가 지나는 길목이었으며,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이기도 했다. 1905년 경부선 평택역이 군문포와 인접한 통복동에 설치된 것도 포구를 통해 유입되는 서해안의 미곡과 물산 때문이었다.44) 군물포는 ‘청일전쟁(1894)을 겪으며 청군이 들어온 곳’이라는 뜻에서 군문포軍門浦로 바뀌었다.
1895년 편찬된 『평택현읍지』에 군물포였던 것이 1899년 『진위군읍지』에는 ‘군문포軍門浦45)’라고 기록됐기 때문이다. 충청수영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던 사람들이 군문포에 있는 통복점에서 잠시 쉰 뒤 배를 타고 팽성읍 석봉리 원봉나루로 건너갔다. 근대 전후 신궁리 일대가 간척된 뒤에는 신궁리 하궁마을 뱃터로 건너다녔다고 한다. 군문포는 일제강점기 평택교(현 군문교)가 가설되고 1930년 11월 콘크리트 교량으로 개축되면서 나루의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완전히 폐지됐다.



| 군문포 터에 건설한 군문교(2010) |



이포진


위 치 : 고덕면 동고1리



이포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온다. ‘수원부 남쪽 70리에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돼 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수원부 조에는 금물촌면에 있다고 기록됐고, 다른 읍지邑誌에는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나루였다고 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46)에는 수원부 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져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래소청나루라고 해 국도38호를 지나 서평택으로 넘어가는 차량과 사람을 실어날랐다. 이포진에서 배를 타면 안성천 건너 원봉나루나 곤지진, 진위천 건너 오성면 신리 삼동촌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포진은 1930년 궁안교가 가설되고, 1938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교체되면서 역할이 줄었다가 일제 말 수로가 바뀌고 주변지역이 간척되면서 사라졌다.



| 이포진(아래소청나루)이 있었던 동고리(2006) |



통복개(포)


위 치 : 통복동



통복천 하류에 있었던 나루이다. 『대동지지』에 ‘진위현 남쪽 30리 지점에있으며, 양성 가천역 하류로 평택으로가는 길과 통한다47)’라는 기록이 있다.
1770년경 편찬된 『팽성지』에는 ‘평택현 관아에서 북쪽으로 8리 지점에 있는데, 진위현과 수원부로 갈라지는 경계다48)’라고 했다. 통복포의 위치는 통복동 화촌으로 보인다. 화촌은 1974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만의 소금과 새우젓, 굴젓이 거래되던 포구였다.



| 통복포터로 추정되는 화촌(2011) |



삽교포揷橋浦


위 치 : 신대동 삽교



신대동 삽교마을 신대교 아래에 있었던 포구다. 안성천과 도일천이 합쳐지는 지점인데다 바닷물이 유입돼 하천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주민들은 하천에 섶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는데 이것이 마을 이름이 됐다. 옛날 이곳에서 배를 타면 지제동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고덕면이나 팽성읍과도 통했다고 한다. 삽교포는 1922년 신대교 가설과 주변지역의 간척으로 역할이 줄어들다가 1974년 이후 폐지됐다.



| 삽교포 포구마을 신대동 삽교(2010) |



곤지진昆地津


위 치 : 팽성읍 (구)대추리



지금은 미군기지 확장공사로 편입된 팽성읍 구 대추리에 있었다. 대추리 지역은 해방 전후 도두리벌이 간척되기 전까지는 포구였다. 삼국시대에는 경주에서 청주와 진천 또는 천안을 거쳐 북상하면 곤지진에서 배를 타고 현덕면 신흥포나 계두진으로 건넜다. 18세기 초에 편찬된 사찬私撰 『팽성지』49)에 의하면 ‘이곳은 수원으로 왕래하는 나루이다. 밀물 때는 배를 타고 건너지만 썰물에는 옷을 걷고 건널 수 있다. 고깃배 새우젓배들이 나루에 매어져 있다. 이 나루의 위쪽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수원부와 소북면으로 통한다’고 했다(여기에서 수원은 서평택지역의 오성면과 현덕면을 말한다). 크게 번 성했던 곤지진은 1899년 『평택현읍지』가 편찬될 때쯤에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토사가 많이 쌓여 배가 들어올 수 없다’는 기록이 있어 오랜 시간 토사가 쌓여 나루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2년 K-6 미군기지가 주둔할 때까지만 해도 소금배나 고깃배가 드나들었으며, 뱃터에는 주막집이 세 집이나 있었다고 한다.



| 곤지진이 있었던 옛 대추리 곤지머리(2005) |



신흥포新興浦


위 치 : 현덕면 신왕1리



조선시대 수원부 광덕면이었고 현재는 현덕면 신왕1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조에 ‘당포진’으로 기록됐다. 신흥포는 광덕현에서 충청도 평택현이나 아산현으로 건너가는 창구였다. 1974년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팽성읍 노양리 경양포와 아산의 백석포로 건너가는 나루뿐 아니라 안성천 하류의 어항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 ‘수원부선세혁파 성책’에 ‘청어 1동마다 5전, 조기 1동마다 5전, 미역 1동마다 2냥, 조 1섬마다 1전, 쌀 1섬마다 2전, 대맥 1섬마다 1전, 돈 백냥을 1년 포세로서 주인이 거둬갔다. 또 청어 1동마다 3냥, 조기 1동마다 2냥, 미역 1동마다 3전, 대맥 1섬마다 2전, 염 1섬마다 2전, 목화 1척마다 3냥, 창호지 1동마다 15냥, 우피 1장마다 1냥, 담배 1척마다 1냥 5전, 돈 100냥을 포세로서 주인이 거둬갔는데 1886년(고종 23)부터 순화궁에서 거둬갔다50)”는 기록이 있다.
위의 품목을 보면 조선말기의 신흥포는 단순히 어항이나 나루뿐 아니라 선상船商들에 의한 포구상업도 활발했다.



| 신흥포가 있었던 신왕1리(2012) |



계두진鷄頭津


위 치 : 현덕면 권관리



현덕면 권관리 노랑바위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조에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80리(『대동지지』도 동일함)인데 아산으로 통한다’고 했다.
조선후기에는 아산시 인주면 공세포나 백석포에서 배를 타면 계두진에 내릴 수 있었다.
계두진에서는 육로로 안중을 지나 수원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한양으로 가는 과객들이나 상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해방 전후에는 주로 어항과 나루로 기능했지만 1974년 아산만방 조제로 막힌 뒤에는 기능을 상실했다. 지금은 요트와 윈드서핑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계두진이 있었던 평택호관광지 일대(2011) |

주석

43) 제6대로(충청수영로)는 진위현 갈원과 양성현 소사원에서 분기해 충청도 보령의 오천수영까지 연결됐다.
44) 평택시사편찬위원회, 『평택시사』, 2001.
45) 평택사시편찬위원회, 『평택시사』, 2001.
46) 김정호, 『대동지지』, 한양대학교 부설 국학연구소, 1976.
47) 김정호, 위의 책
48) 신치, 『팽성지』
49) 신치, 『팽성지』
50) 최춘일, 『경기만의 갯벌』, 기전문화예술총서 6, 경기문화재단,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