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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교통 · 통신유적>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 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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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고비진


위 치 : 고덕면 궁1리



고덕면 궁리 궁안교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후기 진위현에서 서평택으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원부 남쪽 67리 에 있다’고 기록됐다. 다라고비진은 장호천(진위천), 항곶천(황구지천), 토현천(오산천)이 합류해 흐르다가 안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청나루라고도 불렀으며, 현재의 위치는 궁안휴게소 아래 서정천과의 합류지점이다.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막사리 때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젓배들이 황구지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1930년 소청교(궁안교)가 놓이면서 큰 배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배를 대었고 옹진군 덕적도에서 내려온 조개젓, 새우젓, 소라젓배들도 이곳에서 곡물과 물물교환을 했다.



| 다라고비진 포구마을 고덕면 궁1리(2007) |



동청포


위 치 : 고덕면 동청2리



고덕면 동청리와 청북면 토진리 톷나루를 연결하는 나루였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의 읍치 동항리에서 도일동과 고덕면 율포리를 거쳐 동청포를 건너 한산리와 옹포로 건너갔다.
일제강점 뒤에는 청북면 주민들이 서정리역에서 열차를 타거나 서정리장을 갈 때에도 이나루를 이용했고, 반대로 고덕면이나 서탄면에서 청북으로 건너갈 때에도 이곳으로 건넜다. 나루는 동청2리 뱃터였지만 일제강점 전후에 계루지들이 간척되면서 동연교 아래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직후만 해도 나루터에는 배를 건너 주는 사공이 있었고 주민들은 배 삯으로 일 년에 얼마씩의 쌀과 보리를 거둬 주었다.
동청포 일대는 아산만의 바닷물이 진위천의 민물과 만나는 지점이어서 어패류가 풍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여·붕어·메기·뱀장어·바다새우·민물참게가 많이 잡혔다 하고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 따르면 백화염 1항아리마다 1냥, 석화염 1항아리마다 1냥 5전을 1884년(고종 21)에 해방영에서 거둬갔고, 배 1척마다 2냥을 선세로 수북면의 서상돈이 거둬갔다고 기한다.51)



| 동청포가 있었던 고덕면 동청2리 원동천(2007) |



항곶포(진)


위 치 : 서탄면 황구지리



서탄면 황구지리에 있었다. 『진위현읍지』52)에는 황구포黃口浦라고 했고 ‘예전에는 항곶포項串浦라고 했으며,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수원 경계로 통한다’라고 기록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항곶진(항곶포)’으로부터 비롯됐다. 진위천과 합류하는 황구지천의 본류는 수원 광교산에서 발원한다.
그러다가 수원 시내를 관통하면서 유천과 합류하고, 다시 대황교에서 원천과 합류해 흐르다가 서탄면 내천리에서 내천이 되고, 항곶포가 있는 황구지리 부근에서 황구지천(항곶천)이 돼 진위천(장호천)과 합류한다’고 해 본래 항곶포였지만 19세기 후반에 황구포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곶포는 화성시 양감면의 장안나루와 연결됐다.53) 1970년 전후까지만 해도 화성시 양감면 용소리 학생들이 배를 타고 건너다녔고, 서정리장을 보러 오가는 사람들도 이 나루를 이용했다.



| 항곶포가 있었던 서탄면 황구지리 부근(2007) |



토진포


위 치 : 청북면 토진1리



청북면 토진1리에 있었다. 톷나루·텃나루·선살미나루라고 했다. 반대편의 고덕면 동청리 동청나루와 연결됐으며, 현덕면의 신흥포나 계두진에서 수원을 거쳐 한양을 오가는 소로小路와 공수다리가 나루 옆에 있었다. 조선 말기 기록에 토진土津은 현곡리의 신포와 함께 청북면 삼계리의 ‘옹포’ 영역이었으며, 경우궁에서 포세浦稅, 선세船稅를 받아갔다.
나루의 정확한 위치는 토진1리에서 2리로 넘어가는 구릉 건너편 토진1리 주민 김학목의 가족묘 자리에 있었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갯골이 형성돼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근대교통로가 새로이 형성되면서 쇠퇴했다.



| 옛 톷나루터였던 청북면 토진1리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