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 신도비李大源 神道碑 > 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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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원 신도비李大源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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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포승읍 희곡리 산83-5



이대원(1566∼1587)은 18세 되던 해 인 1583년(선조 16) 무과에 응시해 급 제했다.3) 세조 때 17세에 급제한 남이 도 있었지만 25세에 합격한 원균이나 31세에 합격한 이순신 등과 비교할 때 18세는 매우 이른 나이다.
등과한 이후 승진을 해 21세 되던 1586년 녹도만호에 부임했다. 1587년 (선조 20) 2월 10일 왜구들이 침입하 자 병졸을 인솔해 왜적을 대파했다. 그 의 공을 좌수사 심암이 가로채려 했으나 이대원이 거절해 심암의 분노를 샀다. 1주일 후인 2월 17일 왜선 18척이 손죽도 근처에 침범했다. 이대원에게 앙심을 품었던 심암은 해가 이 미 저물었는데도 그에게 피로한 병사 1백 여 명을 주고 출전을 명령했다. 이대원은 병력 을 규합하고 다음날 싸우기를 건의했으나 심암은 이를 묵살했다. 손죽도에서 휘하의 장수 들과 3일 동안 사력을 다해 전투를 벌였지만 심암은 관망만 하고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이대원은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고 옷을 벗어 절명시 28자를 쓴 다음 “이것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장례하라”고 유언했다. 결국 이대원은 손죽도 해전에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됐고 항복을 거부하자 왜구들은 그를 돛대에 묶어놓고 때렸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대원은 이전의 전공으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됐으나 교지가 도착하기 전 전사하는 바람에 수여되지 못했고 그 때 받은 교지 또한 유실됐다. 이후 현종 때 충청수사를 지낸 증손자 이석李錫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1668년(현종 9) 정려旌閭와 병조참판으로 추증하는 교지가 내려졌다.
신도비는 증직 교지가 내려지고 충신정문이 건립된 후 31년이 지난 1699년(숙종 25)에 세워졌다. 이것은 이석의 셋째 아들인 항발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항발이 남구만에게 신도비문을 부탁하자 남구만은 몇 번을 사양하다가 간청을 받아들였다. 이항발이 가져온 사료와 정기명의 ‘녹도가’ 등 문헌을 참고해 비문을 지었으며 승정원 우부승지였던 김진규가 전액篆額하고 경기도관찰사 조상우가 글씨를 썼다. 이들은 모두 서인西人이었다가 남구만과 조상우는 소론小論으로, 김진규는 노론老論으로 갈렸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는데 남구만과 조상우는 송준길의 문인이었으며 김진규는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이들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은 이대원을 숭앙崇仰하고 신도비를 건립하는 일이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신도비는 높이 217cm, 폭 86cm, 두께 38.5cm이며 보호각 안에 있다.



| 이대원 신도비 |



주석

3) 무과방목에는 31세로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