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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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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창리海倉里66)


해창리는 조선시대 진위현 고두면 지역이었다. 1914년 방시천리方是川里·마분리·동청리 일부와 수원군 오타면 방시천리 일부, 해창리를 통합해 해창리라고 했다. 해창海倉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해창3·4리 마을에 진위현의 해창이 있어서 유래됐다.


해창리는 6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914년 이전부터 있었던 마을은 해창2리(마분)·해창3리(원해창)·해창4리(신촌)·해창5리(방시천)뿐이고 염촌(염소말, 1리)·대창동은 나중에 형성된 마을이다. 대략 500∼600년 전에 형성된 해창3리부터 한국전쟁 뒤에 형성된 해창6리까지 다양하다. 논농사가 많으며 인구밀도가 비교적 높다. 근래 신풍제지 등의 회사들이 들어와 농사 지으며 회사 다니는 사람도 늘고 있다.


해창1리의 자연지명은 본래 파주 염씨들이 이거한 120∼130년부터 개척했다고 해 ‘염촌(염소말)’이다. 예전에는 50호가 넘었지만 진위천 변 갯가에 위치해 수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바람에 이주한 사람이 많아 현재는 20여 세대만 남았다.


해창2리의 자연지명은 ‘마분馬墳’이다. 마분은 옛날 마을 서북쪽에 있었다는 마정승의 묘에서 유래됐다. 30여 년 전만 해도 25호지만, 1980년대 가나안 주택 등 공동주택이 들어서고 근래에 문화마을이라는 특별한 전원주택단지가 입주하면서 130세대로 늘었다. 김해김씨가 대성大姓이다. 김해김씨는 150여 년 전에 입향해 전통적으로 해창들을 중심으로 논농사를 지었다.


해창3리는 조선시대에 진위현의 해창海倉이 있던 마을이다. 예나 지금이나 65호 내외다. 청주한씨·김해김씨·평창이씨가 많다. 이들은 대체로 5∼6대씩 세거했다. 마을의 큰 지주는 청주한씨였고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농민들이 자작농이 된 것은 제1공화국 시기의 농지개혁과 1970년대 아산만방조제 준공의 영향이다. 주민들은 마을 입구의 신풍제지나 삼정펄프 같은 새마을공장에 다니면서 농사를 겸업하는 가호家戶도 많다.


해창4리의 자연지명은 ‘신촌’이다. 본래 원해창과 같은 마을이었다가 호 수가 증가하면서 고덕면장 송주헌씨가 분동시켰다. 60호 내외이며 김해김씨가 대성大姓이지만 대체로 각성바지다. 대다수가 농업이었으나 근래에는 농사를 지으며 근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두 마을은 분동된 뒤 회관이나 경로당도 따로 지었고 대동계도 따로 열지만 당제堂祭만큼은 격년제로 함께 지낸다.


해창5리는 ‘방시천’이다. 진위천의 지류인 방시천(서정천 하류) 냇가에 형성됐다고 해 유래됐다. 1960년대만 해도 30호가 안 됐다가 지금은 75호 내외다. 마을은 150여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성씨는 평해손씨와 순흥안씨가 많은 편이다. 농업인구가 많으며 유입된 사람들 중에는 회사원도 많다.


해창6리는 ‘대창동’ 또는 ‘고척골’이다. 한국전쟁 뒤 피란민 정착촌이 설치되면서 형성됐다. 정착초기 피란민들은 황무지를 개간했지만 정착과정의 어려움으로 떠난 사람이 많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농업인구가 적고 회사원이 많다.



마정승의 묘가 있었다는 해창2리 마분(2007)

| 마정승의 묘가 있었다는 해창2리 마분(2007) |



조선시대 진위현의 해창이 있었던 해창3·4리(2012)

| 조선시대 진위현의 해창이 있었던 해창3·4리(2012) |



주석

66) 염은철(63세), 최승학(60세, 해창5리 이장), 2007년 해창 2리와 해창5리 마을회관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