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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大津
위 치 :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포승읍 만호리의 솔개바위나루의 옛 지명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한진漢津, 『만기요람』에는 대진포로 표기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편에는 ‘치소治所로부터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54)에 있다’고 했다. 대진은 좌우 폭이 10여리나 됐다. 대진 부근은 암석이 많고 물 흐름이 무척 세고 빨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만기요람』55)에도 ‘바람이 일면 파도가 매우 심하다, 조세潮勢가 사납다’라고 기록했다.
조선 고종 때 ‘조선방역지도’에 따르면 대진大津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당교역항이었다. 『조선방역지도』 여백에 ‘대진삼국시백제어혜군지가리저동치수군창신라평백제치관적욕호수관당지사개상매개취관라인조공역유자인명대진大津三國時百濟於槥郡之可里渚東置水軍倉新羅平百濟置館積穀號稤館唐之使价商賈皆就館羅人朝貢亦由此因名大津’라는 문장이 표기돼 있다. 대진은 백제 때는 수군창이 있었으며, 신라의 영역이 되면서 당나라를 오가는 사신들과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초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설치됐다.56) 수군첨사의 설치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문이었다.57) 그러다가 수군만호로 격하됐고, 1457년(세조 3) 1월에는 왜구의 침입이 중단되면서 아산만 입구 난지도의 수군만호와 통폐합됐다.
수군만호가 폐지된 뒤에도 대진은 충청도 내포지방을 연결하는 해로교통의 요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와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라고 해, 충청도 서북부의 당진·면천(주)·서산·태안·홍성(주) 등 여러 읍邑과 교통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도 대진은 내포지방을 연결하는 해로교통로로 역할했다. 만호리 주민들은 안중장날이면 당진·서산·태안에서 한선에 소를 싣고 오가는 소장수들로 인해 나루터가 붐볐다고 기억하고 있다.
| ‘대진’이 있었던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마을 |
| 포승읍 만호리 대진나루 |
호구포虎口浦와 자오포
위 치 : 포승읍 홍원리
조선시대 홍원목장의 말과 소를 운송했던 곳이며, 화성시 장안면 장안포와 연결됐던 나루다. 청북면이나 포승읍, 안중읍의 주민들은 발안장을 보거나 수원을 다녀올 때 자오포나 호구포에서 배를 타고 장안포에서 내렸으며, 화성시 장안면 사람들도 자오포를 통해 안중장을 오갔다.
홍원목장은 홍원리와 포승면 원정리, 도곡리 등 5곳에 걸쳐 있었으며 초기에는 말을 사육하다가 후기에는 소도 길렀다. 목장의 말은 제주도에서 어린말을 들여와 사육한 뒤 자오포나 호구포에서 실어냈다.
| 포승읍 홍원리 호구포(2005) |
주석
54) 포승읍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포내면과 승량동면에서 각각 한 글자씩 취해 만들어진 지명이다. 포내면은 고려시대에 포내미부곡에서 유래됐다. 조선시대에도 ‘포내미’라고 불렀다.
55)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만기요람』, 1984.
56) 『만기요람』 위의 책
57) 고려 말 왜구는 공민왕 때 전후해 용성현(안중읍 용성리 일대), 광덕현(현덕면 덕목리 일대), 평택현(팽성읍일대), 경양폐현(팽성읍 계양지역) 등에 침입해 분탕질을 했다. 『고려사』에 공민왕 7년(1358) 면주(당진군 면천면)를 거친 왜구가 용성현에 침입하자 고려가 군대를 파병해 적선 2척을 빼앗았으며, 공민왕 9년(1360) 5월에는 양광도 평택, 아주(아산), 신평에 침입한 뒤 용성현(평택시 안중읍) 등에 침입해 10여 현을 불태웠고, 공민왕 21년에는 양광도 순무사 조천보가 용성현에서 왜구와 싸우다 전사했으며, 우왕 3년(1377)에는 평택현과 경양현(팽성읍 본정리, 노양리 일대)을 노략질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