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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도일동 산82
원균(1540~1597)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의 장남이다. 그의 집안에는 무예
에 능한 사람이 많았다. 원균의 첫째 동생 원연元埏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물
리친 공으로 양주 진관 병마절제도위가 됐다. 셋째 동생 원전은 무과에 급제해 원균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원균의 외아들 원사웅은 칠천량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했다. 원연의 차남 원사립은 왜적과 여진족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
원균은 25세에 무과 급제로 관직에 진출한 후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족을 토벌해 명성을 얻었다. 여진족들은 원균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균이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부임한 것은 1592년 2월경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2달 전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사들이 동요하고 도망치는 가운데 함선과 병사를 이끌고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부대와 연합해 옥포, 당포, 한산도 전투에서 연승을 거뒀다. 그러나 이순신과의 대립과 갈등이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해 이순신을 기용했다. 1597년 조정의 명령을 어긴 죄로 이순신이 파직된 후 통제사에 올라 부산포의 왜군 본진을 공격하라는 권율의 강요로 전투에 임했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왜란이 끝난 후 선무공신 일등으로 책록돼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 君에 추봉됐으나 신도비가 세워졌다는 기록도 없고 전하는 비석도 없었다. 뒤늦은 1981년 7월 원주 원씨 집안에서 원균 묘역 앞에 신도비를 건립했다. 원균의 신도비는 글을 따로 짓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원균 행장을 정리했다.
| 원균 신도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