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준량 신도비元俊良 神道碑 > 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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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준량 신도비元俊良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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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도일동 내리마을



원준량은 원몽元蒙의 증손이며 원균의 아버지다. 무과에 급제해 춘추관 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쳤으며 1544년(중종 39) 선전관宣傳官 소임을 수행 중 임금으로부터 군령軍令을 엄중하게 지키지 못해 군정軍政이 문란해졌다는 질책을 받았다. 1552년(명종 7) 전라우도수사全羅右道水使로 재직 중 제주도에 왜인들이 침범해 변란을 일으켰는데도 즉시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됐다. 1557년(명종 12) 경상좌도수사慶尙左道水使에 임명됐다. 이후 경상좌도병사慶尙左道兵使, 전라좌도수사全羅左道水使 등을 역임했다. 1566년(명종 21)에 사헌부司憲府로부터 탄핵을 당해 관직에서 파직됐다. 아들인 원균이 선무일등공신이 되자 영의정에 추증됐다.
신도비는 1800년(정조 24) 그의 8세손 원병상元秉常의 주도로 세워졌다. 원병상의 스승 이었던 규장각 검교 직제학 김재찬金載瓚에게 부탁해 글을 지었다. 김재찬은 비문에서 ‘원 준량의 세계世系, 자질, 경력, 후손’에 대해 서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김재찬은 연안김씨로 1774년(영조 50)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800년(순조 즉위)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후 영의정과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했고 순조 묘정에 배향됐다. 원준량 의 8세손인 원병상과는 사제관계였다. 이조참판 민병승閔丙承이 글씨를 썼다. 신도비는 원 준량의 묘역 바로 앞 길가에 있으며 높이 159cm, 폭 56.3cm, 두께 27cm이다. 기대 위에 비신碑身이 있으며 그 위에 옥개석을 얹은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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