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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陽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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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법정지명


평택시 서북부·남부·서부의 일부를 관할하던 양성현 지역은 1896년(고종 33) 지방제도 개편 때 일부 지역이 수원군에 속했다. 조선시대 양성현 지역은 1914년 당시 수원군 승량면升良面(양성현 승량동면), 수원군 율북면栗北面(양성현 율북면), 수원군 감미면甘味面(양 성현 감미동면), 양성군 구룡동면九龍洞面 소사리, 승량원면升良院面 방촌·기동·신촌 등 일부, 면하촌面下村 ·중리·하중리·상촌, 영통면令通面 유천리, 도일면道一面, 소고니면所古尼面 일부와 최근에 편입된 월곡동月谷洞·죽백동竹柏洞·용이동龍耳洞·청룡동靑龍洞(양 성현 반곡면盤谷面 지역) 등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양성현 지역으로 추정되는 현재 지명]


구분 현재 법정 지명
송탄지역 도일동 일부, 서정동 일부, 가재동 일부, 장당동 일부
평택지역 비전동 일부, 소사동, 용이동, 월곡동, 유천동 일부, 죽백동, 청룡동, 합정동 일부
진위면 은산리 일부
서탄면 황구지리
고덕면 율포리 일부, 동청리 일부
오성면 길음리 일부
청북면 고잔리, 삼계리, 어소리 일부, 어연리 일부, 한산리 일부, 율북리, 현곡리 일부, 후사리 일부
포승면 내기리 일부, 방림리 일부, 신영리 일부, 원정리 일부, 희곡리 일부
현덕면 방축리 일부, 황산리 일부


행정구역의 변천


양성현 지역은 본래 백제27)의 사복홀沙伏忽 혹은 사파흘沙巴乙이라 했다. 신라가 통일한 뒤 757년(경덕왕 16) 적성赤城으로 고쳐 백성군白城郡의 영현28)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양성현이 됐고 1018년(현종 9) 수주水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1175년(명종 5) 비로소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시대 1398년(태조 7) 본현에 속하던 포내미부곡·신영장新永莊 등과 함께 마치 개의 이빨처럼 수원부에 어긋나게 들어가 있어 수원부에 속하게 했다. 1413년(태종 13) 양성현에 속한 종덕宗德을 수원부로 옮겼다.
조선후기 양성현은 지질동면紙叱洞面·송오리면松五里面·구천면九千面·공제면孔悌面·원당면元堂面·승량원면升良院面·영통면令通面·금질동金叱洞·덕산德山面·구룡동면九龍洞面·소고니면所古尼面·율북면栗北面·서신리면西新里面·감미동면甘味洞面·승량동면升良洞面 등으로 편제됐다. 1895년(고종 32) 23부제를 실시하자 공주부에 속했으며 양성현을 양성군으로 고쳤다. 1896년 1월, 다시 13도제로 개편할 때 양성군은 경기도로 옮기고 월경지越境地29)인 소고니면·율북면·서신리면·감미동면·승량동면 등이 수원군과 진위군에 속하게 됐다. 1914년 개편 때 양성군은 안성군에 병합됐고, 수원군으로 옮겼던 월경지는 대부분 진위군에 편입됐다.



주석

27) 『世宗實錄地理志』에는 고구려라고 표기되있다.
28)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모든 지방 군현(郡縣)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지역에 한해 배치했다.
 즉 고려시대 외관(外官)이 파견된 영군(嶺郡)·영현(領縣)과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속현(屬縣)으로 구분됐다
29) 고려 1018년(현종 9) 주현의 영속관계가 확립된 이후 종전의 임내任內(속현, 향, 소, 부곡)가 분리·독립하면서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