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현永新縣 > 연혁

본문 바로가기
연혁 > 근대이전 > 진위군 지역 > 영신현
■ 영신현永新縣

본문

현재의 법정지명


고려시대 영신현은 1914년 통합 당시 옛 진위군 여방면餘方面 지역으로 추정된다.7)



[영신현 지역으로 추정되는 현재 지명]

구분 현재 법정 지명
송탄지역 도일동 일부, 모곡동, 칠원동, 칠괴동
평택지역 동삭동, 지제동 일부


행정구역의 변천


영신현은 양성지역에 속했다. 757년(경덕왕 16) 영풍현永豐縣이 되어8) 수성군水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에 영신현으로 바뀌고 1018년(현종 9)에 수원의 속현이 됐다.
조선 초기에도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1431년(세종 13) 영신현을 수원부의 속현에서 진위현으로 옮기는 요청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수원부 판관의 재설치를 논의할 때 경기감사의 건의9)에 따라 1433년(세종 15) 영신현이 수원부에서 진위현으로 편입됐다. 조선후기 영신현은 여방면 지역이 됐다.



주석

7) 조선후기 면 가운데 영신현과 가까웠던 병파면과 성남면이 영신현에 속했을 가능성도 많지만 확실치 않으므로 그 지역은 진위현에 포함했다.
8) 영신현은 영풍 또는 오타(五朶)라고 했다고 한다(『고려사』 56, 『지리지』 1).
9)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렇게 한다면 관직이 증설되고 아록衙祿이 증가될 것이니 다시 설치할 수 없다. 이웃 고을 진위는 호수가 대단히 적어 자립할 수 없으므로 전자에 수원 관내의 영신을 떼어 주자는 요청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청호역菁好驛을 떼어붙여 과객을 접대하는 폐단만 증가해 이로부터 더욱 지탱할 수 없게 됐으니 수원의 민호를 떼어서 진위로 붙이도록 청했다. 또는 수원의 사무가 이제 와서 복잡할 것이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같으며 판관을 없앤 지 거의 40년이 됐으나 모든 사무를 잘 처리해 기한을 놓친 일이 없었는데, 하필 판관을 다시 두어 국고만 소비하려는가. 제도를 세우는 데 금방 없었다가 금방 다시 세워 일정한 제도가 없으면 신의를 보일 수 없는 것이니 회복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했다. 어떤 이는 “수원은 속현이 많고, 땅이 크고 백성이 많아서 한 사람이 능히 다스릴 수 없다. 국가에서 어찌 홀로 수원만 후하게 하고, 곁의 고을을 박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수원의 백성이 많고 일이 번거로운 폐단을 구제하려면 속현을 떼어서 땅이 작은 곁에 있는 고을에 붙이는 것이 옳다. 만약 감사의 본영本營이기 때문에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면 곁의 고을은 오랑캐의 땅이란 말인가”라고 했다. 임금이 호조로 하여금 본도에 문서를 보내 가부를 묻도록 했더니, 감사가 회보하기를 “영신은 진위와의 거리가 10리이고 수원과는 60리이며, 또 큰 내가 가로막혀, 비가 와서 물이 많으면 건너지 못해 부역과 환곡을 기한에 미치지 못해 폐가 적지 않다. 또한 진위는 호수戶數가 심히 적고 사객使客이 많아서 자립할 수 없으니, 영신을 떼어서 진위에 붙이고, 수원 판관은 혁파한 후에도 별로 폐되는 일이 없으니 회복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수원 사람이 행정구역이 줄어드는 것을 싫어해 본도에 진정해 이속移屬하지 말기를 청했으나 듣지 않자, 영신현의 서면西面 세 마을은 다른 속현과 더불어 개 어금니처럼 지형이 들쑥날쑥한데, 이제 이것을 분변하지 아니하고 모두 진위로 붙이면, 후일에 나오고 들어간 땅을 개정하는 소송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한길 동쪽 여섯 마을은 진위에 붙이고 한길 서쪽 세 마을은 그대로 본읍에 붙이게 하도록 청하므로 감사가 그 말에 따르기를 청했다. 의정부와 육조에서 같이 논의하기를 “개 어금니처럼 서로 나오고 들어간 논의는 거행할 수 없는 것이며 죄 없는 영신을 두 고을에 나누어 붙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해 모두 수원에서 진위로 관할 지역을 옮겼다(『世宗實錄』 권60 15년 6월 23일 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