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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삼한·삼국·통일신라 > 삼한시기와 백제초기의 평택 > 초기백제의 지배
■ 초기백제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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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을 구성하던 많은 소국들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성장함에 따라 이들 나라에 점차 병합·흡수됐다. 고구려는 옛 고조선과 한사군漢四郡 영역인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역을 중 심으로 성장했고, 신라는 진한 영역인 경상도 지역에서 발전했다.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시 작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건국설화에 따르면 백제를 세운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들이었다. 이를 통해 백제를 세운 상층 세력이 고구려 또는 부여와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 초기 무덤 양식이 고구려의 적석총과 유사한 것 등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 다. 건국 당시 백제는 두 개의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미추홀(지금의 인천)과 위 례성(지금의 서울)이었다. 이후 백제의 중심은 위례성이 되었고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세력 을 확장했다.
백제는 마한의 소국 중 하나로 출발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를 세운 온조왕에게 마한 의 왕이 사신을 보내 백제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나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35)
한강유역에서 발원한 백제의 성장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평택지역에 대한 마 한의 지배력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온조왕 13년 기록에 백제의 영역이 남쪽으로 웅천熊川까지라고 적고 있는데 웅천은 안성천 또는 금강으로 보인다. 온조왕 36년 기사에는 백제가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민가를 나누어 살게 했다. 그런데 탕정성은 지금의 아산 읍내동산성邑內洞山城으로 여겨진다. 비록 온조왕대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기는 하지만 백제가 이른 시기에 평택지역을 차지했던 것은 확실하다 하겠다.
백제의 영역이 된 평택지역은 백제의 군현제 내에 편제됐다. 진위지역은 연달부곡淵達部曲·금산현金山縣·송촌활달松村活達 등으로 평택지역은 하팔현河八縣으로 불렸다.36) 이후 평택지역이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백제 고이왕 5년(238)으로 삼국사기는 백제 고이왕이 “부산釜山에서 사냥을 하고 50일 만에 돌아왔다”37)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이란 지명은 고구려가 진위지역을 점령하고 바꾼 이름이다.
백제는 100개百의 포구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로와 수로를 중요시 여겼다. 백제가 십제十濟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인천(미추홀)에 처음 자리를 잡은 것도 이런 특성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백제는 한강유역과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해상활동을 펼쳤으며 한반도를 넘어 일본 및 중국과도 밀접한 교류를 가졌다. 따라서 수도가 있는 한강유역에서 가까우면서도 서해에 접하고 하천이 많아 수운과 해운에 편리한 지리적 특징을 가진 평택지역은 초기 백제에게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주석

35) 『三國史記』 권 23, 百濟本紀 1, 溫祚王 24년
36) 평택시통합사편찬위원회, 『평택시 통합사』, p.33.
37) 『三國史記』 권 제24 百濟本紀 제2 古爾王 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