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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삼한·삼국·통일신라 > 평택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 > 고구려 남하정책
■ 고구려 남하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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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평택지역을 차지했던 백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37년 건국해 요동과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성장시켜 오던 고구려가 5세기 초부터 백제의 지배력을 흔들기 시작했다. 중국 왕조들의 분열을 틈타 6~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남하정책을 시도했고 결국 백제는 당시 수도였던 위례성과 세력기반이던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넘어 경기남부지역까지 진출했으며 평택지역은 장수왕 때부터 고구려의 영향력에 들게 됐다.

고구려의 광개토왕(광개토대왕)은 즉위 직후부터 백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예성강과 임진강유역에까지 걸쳐 있던 백제 영토는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장수왕은 수 도를 압록강유역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실시했다. 장수왕은 475년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변에 위치했던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 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했다. 백제는 한강유역과 경기도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 고 수도를 지금의 공주인 웅주로 옮겼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가 되었던 지역이 바로 지금의 평택이다. 고구려는 아산만과 안성천을 경계로 백제와 대치했다. 삼국사기는 지금의 안중과 진위지역이 고구려의 영토 였으며 당시 이름이 상홀현上忽縣과 부산현釜山縣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8) 현재 진위 견 산리에 남아있는 성터를 부산성이라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곳이 고구려 부산현의 중심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와 달리 오늘날 안성천 이남인 팽성지역이 고구려의 영토 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할 때 장수왕대 고구려 남하정책으로 인해 지금의 평택지역은 안성 천을 기준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로 나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평택은 고 구려와 백제의 경계지역이자 최전방으로서 중요성이 매우 컸으며 이후 평택지역은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한강유역과 당항성으로 대표되는 서해연안 지역의 배후지로서 군사적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주석

38) 『三國史記』 권 제35 雜志 제4 地理 2 新羅 漢州 唐恩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