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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 지역의 후기 의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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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의 후기 의병항쟁은 당시 발행됐던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06년 9월 8일
경부선 병점역 동쪽 30리 선장동에 의병 700여 명이 오산역과 진위역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했다. 이들은 용인군 서남 산동 윤기선의 집에서 화승총 2정과 김영희 집에서 서양 식 엽총 1정을 탈취해 죽산 쪽으로 진출했다.
1906년 10월 15일
수원군 광덕면(현재 현덕면 덕목·대안·신왕리 지역)에 사는 유영렬의 집에 의병 10 여 명이 육혈포를 가지고 들어와 군자금으로 엽전 2만 냥과 수표를 탈취한 후 달아났다. 이때 다친 사람은 없고 놀란 사람들이 많아서 치료를 받으러 상경했다. 이런 틈을 타 일본인 약상 2명이 약을 팔기 위해 그의 집에 들렀다가 웅담·사향·우황 등 약재 수만 냥 어치를 훔쳐가기도 했다.
1907년 1월 1일
수원군 광덕면 소박동에 사는 승지 정태엽의 집에 의병 3명이 총검을 가지고 들어와 물건을 빼앗고 군자금으로 전답 30여 석락문권을 탈취해 갔다.
1907년 3월
동년 3월에 진위·수원·용인·오산 등지의 마을에 의병 수십 명이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에 일제 순검 7명이 수원과 오산 등지에서 의병 김순경과 김원순을 체포했다.
1907년 7월
수원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이 배포된 이후 의병 100여 명이 지평군 상북면 용두리와 여주에 집결했고 진위·용인에서도 의병이 봉기했다.
1907년 8월 31일
진위군 북면 동천동(지금의 진위면 동천리)에 사는 이건석의 집에 의병 16명이 들어와 서양총 7정을 탈취해 갔다.
1907년 9월 15일
수원군 토진(현 청북면 토진리)에 의병이 출몰했다는 정보가 있어 일경 10여 명이 출동 을 했으나 흔적이 없자 일경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자 주민 서택순이 격렬 히 항의했다. 이러한 서택순을 일경이 결박하고 6∼7분간 구타해 기절시켰다.
1907년 9월 17일
일경 1명이 행방불명됐고  이날 밤 12시에 의병 14명이 총기를 지니고 진위역 동쪽 10리 거리에 있는 일북면(현 진위면) 동장을 결박하고 서양총 2정을 강탈해 갔다.
1907년 10월 5일
진위역 동쪽 15리에 있는 동천동에 의병 24명이 서양 총과 화승총 및 군도를 가지고 출현해 총기를 요구했다. 이에 주민이 불응하자 폭행하고 도주했다.
1907년 10월 6일
의병 약 30여 명이 진위군 동방 약 30리 지점에서 일경과 교전한 뒤 용인쪽으로 진군 했다. 이와 같이 진위군 지역에서 의병들의 활동이 빈번해지자 경기도 선유사 정인흥이 진위군을 순시할 때는 일경 20∼30명이 보호했다고 한다. 진위군수 김영진은 일어에 능통해 일경이 진위군에 와서 의병들을 수색하려고 하면 “본 군내에는 의병들이 없음을 본인이 보증할 터이니 무고한 군민들을 침해하지 말 것”을 설득해 일경들이 들어가지 않자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1907년 12월 12일
진위수비대에서 수원수비대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일경과 의병들 간 교전이 있었다. 진위군 요당 근처에 의병이 있다해 일경이 출동했으나 의병들이 행적을 보이지 않자 의병들을 정찰해 요당사 부성을 거쳐 현덕면 가사리, 천곡, 도대리에 이르렀을 때 의병들이 있어 급히 추격, 의병들과 교전했으나 이들은 사방으로 도주했다.
1907년 12월 29일
진위군 남서부에 의병이 주둔한다고 해 일경 1개 중대가  출동했다.  일경이  도착하자 의병들이 총을 쏘며 응전했다. 서로 교전했으나 의병들은 후퇴했고 일경들은 진위군 서남방 서정리 근처로 이동해 의병과 접전을 준비했다.
1908년 1월 14일
진위 서쪽 약 20리 거리에 있는 황구진 서북 2동과 서곤리 부근에 의병 약 20명이 숙영한다는 정보를 접한 일제는 수원수비대의 일경 9명을 출동시켰다.
교전이 있었으나 의병들이 퇴각해 교전이 종결됐다.
1908년 1월 21일
의병 50여 명이 수원 남방 약 80리 해창(현 고덕면 해창리)에서 수원수비대와 교전했다.  1월 23일 진위수비대에서 수원군 탑평 부근으로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후 의병과 교전해 의병장 우성오 이하 5명이 생포됐다.
1908년 2월
안중장에 30∼40여 명의 의병이 출몰하자
성환 수비대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1908년 3월 4일
의병 150여 명이 진위군  안중장  서남1리 굴평에  출몰했다.
1908년 3월 13일
의병 약 15명이 진위군 서방 40리 지점에서  일경과 교전했으며
3월 18일에도 의병 10여명이 진위군 서쪽 4리 지점에서 진위 수비대와 교전했다.
1908년 3월 20일
의병 20여 명이 수원군 토진면 판교(현 청북면 한산리)에서 일진회 회원 2명을 처단했다. 의병들은 일진회 회원 김기순과 배성순을 체포한 후 포박해 율북면으로 데리고 가서 처단하고 배성순의 처를 잡아갔다.
김기순과 배성순은 평소 일제의 밀정으로 의병들을 정탐하는 일을 맡아왔다. 따라서 수원군 의병 부대는 이들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응징했다.
1908년 3월 23일
수원군 안중장 동북쪽 운촌 부근에서 수원 수비대 일경과 의병 10여명 간에 교전했다.
1908년 7월 17일
1907년 8월부터  평택·죽산·양지·안성·용인·수원 등 경기 남부 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정주원과 소대장 이상덕이 아산군 행해도에서 일제의 성환 수비대와 교전 끝에 체포됐다.


평택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으로는 안춘경安春京·홍일초洪一初·정관원鄭關元·천하준千河駿 등이 있다.
안춘경은 대장장이로 생활하다가 1907년 7월 정주원鄭周源을 만나 의병에 투신했다. 의병에 참여한 후 부하 40∼400여 명을 지휘하면서 정주원 부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07년 12월 수원군 광덕면(현 현덕면)에서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1908년 6월 문덕준文德俊 등 6명을 인솔하고 수원군 청용면 대미(현 청북면) 방여재方汝在의 집에서 의병활동 자금으로 8원을 모금했다. 1908년 9월 정주원이 충남 해미면 적서촌에서 체포된 후 의병장으로 추대돼 정주원 부대를 통솔했다. 정주원을 밀고한 자를 색출·응징하는 등 활약하다가 1909년 12월 7일 수원군 문시면에서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원절총元折銃 3정·화승총 8정·군도 2자루를 소지하고 있었다. 경성지방에서 7년형을 받고 수형생할을 하던 중 3년을 감형 받아 1911년 9월 출옥했다. 그 후에도 박은조朴銀兆·배관옥裵貫玉 등과 함께 한경서韓景瑞의 집을 비롯해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이로 인해 다시 체포돼 1914년 9월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평택 청북면을 근거지로 활약했던 홍일초는 주사 출신으로 평택을 포함해 남양·용인·양성지역을 중심으로 소부대를 편성, 토벌군을 피하면서 기습작전과 첩보활동 등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4월 정주원 부대 200여명과 연합해 수원군 청용면(현 평택시 안중읍, 청북면)에 지휘소를 마련해 활동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