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과 아산만 유역권 > 역사

본문 바로가기
역사 > 삼한·삼국·통일신라 > 삼한시기와 백제초기의 평택 > 마한과 아산만 유역권
■ 마한과 아산만 유역권

본문

한반도 북쪽과 요동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고조선이 한에 의해 멸망하면서 고조선 유민들은 한반도 남쪽으로 유입됐다. 철기문화를 비롯해 앞선 문화를 가지고 있던 이들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진辰의 세력과 결합해 삼한三韓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게 됐다. 삼한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한다. 평택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렸던 가장 오래된 정치체제가 바로 삼한이다.
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한조韓條 부분이다. 그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朝鮮 준準이 참람해 왕이라고 일컫다가 연燕나라에서 도망해 온 위만衛滿에게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이에 그 측근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지韓地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일컬었다. 그 후손이 망해 없어졌으나 지금도 한인 가운데에는 아직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29)



준왕은 한이라는 곳으로 달아난 것에 대해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서는 “조선왕 준이 바다로 달아나 마한馬韓을 공격해서 깨뜨리고 한왕이 됐다”30)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고려의 일연이 쓴 『삼국유사』도 “조선왕 준이 바다를 넘어 남쪽으로 한지에 이르고 나라를 열어 마한이라 이름했다”31)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준왕이 도망해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로 이동했으며 그 지역에는 마한, 또는 마한의 전신이 되는 세력이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삼한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마한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학설에 따르면 마한은 서해에 인접하고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화가 일찍부터 존재했던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2) 또한 마한은 이후 한강유역에 새롭게 자리 잡은 초기 백제와 세력다 툼을 벌이게 된다. 그렇다면 마한은 서해에 인접하면서도 한강유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이다. 종합해보면 마한은 평택·천안·직산·아산·신창·온양·예산을 포괄하는 아산만 유역권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33)
준왕의 상륙을 계기로 아산만 유역권에 속하는 평택지역이 드디어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한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대 50여 개 소국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그 주도 권은 현재 천안 지역에 자리 잡은 목지국目支國에 있었다. 따라서 마한의 여러 소국들 중에 는 지금의 평택지역에 존재했던 나라들도 있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34)



주석

29) 『三國志』 권 30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韓條
30) 『後漢書』, 권 85, 東夷列傳 75, 韓條
31) 『三國遺事』 권 1 紀異 馬韓條
32) 익산설(益山說), 공주설(公州說), 광주 경안설(京安說), 직산설(稷山說), 금마설(金馬說), 내포지역설(內浦地域說)등으로 구분 된다.
33) 이에 대해 고고학적으로 청동기 일괄유물이 출토된 아산 남성리나 예산 동서리 일대를 주목한 견해도 있다(朴燦圭, 『百濟의 馬韓征服過程 硏究』, 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95, pp.68∼69).
34) 지금의 팽성 지역은 신분활국臣濆活國에, 진위 지역은 모수국牟水國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져 왔는데, 이에 대한 반론 역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