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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에도 불구하고 평택을 비롯한 경기도 한강이남 지역에 고구려의 지배력
이 얼마나 실재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한강이남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수도인 위례성과 평택을 비롯한 경기남부 지역을 빼앗긴
백제가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실시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제 동성왕은 웅진 천도 후 어지러운 상황을 수습하고 고구려의 공세에 대항해 신라와 동
맹을 맺는데 이것이 나제동맹(433년)이다.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인해 고구려의 남하정책
은 저지되었고 동성왕과 무령왕 대를 지나면서 백제는 한강유역 일부에까지 영향력을 행
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평택지역 역시 다시 백제의 영역으로 흡수되었으리라 생각되
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무령왕에 이어 551년 왕이 된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빼앗겼
던 한강유역의 6개 군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러나 한강유역을 회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깨고 백제를 공격했다. 그 결과 백제는 회복했던 한강유역 대부분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554년 성왕마저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 신라의 전성기 지도(6C) |
이후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라의 동맹 파기는 서해의 당항성을 독점해 중국과 외교 및 교역을 시도하려는 의도였다. 당항성이 지금의 화성시 남양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남양만을 따라 서해연안에 접해있는 평택지역이 신라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중의 자미산성에서 6세기 신라의 단각고배가 출토된 것은 이 지역이 6세기에 이미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영역 다툼은 평택지역을 포함하는 평택-안성-직산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됐다. 일례로 7세기 전반 신라의 장수였던 심나沈那는 직산 출신이었는데 그와 관련된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백제와 신라의 경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39) 또한 642년 백제 의자왕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쪽 40여 성을 공격해 빼앗고 8월에는 고구려와 모의해 신라의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으려 공격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백제의 목표가 오늘날 화성시 서신면 일대의 당항성이었고 그것을 목표로 40여 성을 공격해 빼앗은 것이라면 평택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 평택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 또는 경계에 인접한 지역으로 군사적인 중요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남하 이후 신라 통일 전까지 지배세력의 국적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군사적 긴장상태가 계속됐다는 점에서 당시 평택지역 백성들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주석
39) 『三國史記』 권 제47 列傳 제7 素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