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링크
본문
13세기 동아시아 정세는 몽골민족의 강세로 인해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몽
골은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13세기 초 테무친鐵木眞이 여러 부족을 통합해 1206
년(희종 2) 칸迀의 지위에 올라 징기스칸成吉思迀이 됐다. 이 때부터 몽골은 정복으로 영토
를 확장하고 금나라를 공격했으며 고려 또한 몽골과의 긴장관계를 피할 수 없었다.
고려와 몽골이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강동성에서 함께 거란족을 공략하면서
시작됐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거란족은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금나라가 쇠약해지자 독
립하려 하다가 몽골족에 쫓겨 고려의 영토로 밀려들어 왔고, 고려의 공격을 받아 강동성에
갇히자 고려와 몽골이 연합해 섬멸시켰다. 이때 두 나라는 형제맹약을 맺었고 고려는 몽
골이 요구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그러나 과중한 공물 부담과 몽골 사신들의 무례한 행
동으로 양국 관계가 긴장됐고, 결국 몽골 사신이 돌아가는 도중 압록강 부근에서 피살되
는 저고여著古與 사건이 일어나 국교가 단절됐다. 이후 1231년부터 몽골의 침략이 시작돼
1259년(고종 46년)까지 전쟁이 지속됐다. 몽골은 모두 6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해왔다.
몽골의 1차 침입은 1231년(고종 18)에 시작됐는데, 몽골 장군 살리타이撒禮塔가 대군을 이
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으로 진격했다. 최씨정권은 몽골의
본격적인 침입에 초기에는 삼군三軍을 동원하는 한편, 지방의 반정부세력인 초적들을 유치
해 각지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고려는 귀주에서 용감하게 대항했으나 수도 개경이 포
위되자 화의를 청했다. 이에 몽골은 서북면에 다루가치達魯花赤을 설치한 이후 철수했다.
화의를 맺은 이후 고려에 대한 몽골의 무리한 조공朝貢요구와 횡포는 더 심해졌다. 몽골
의 침입과 향촌사회의 저항으로 위기에 처한 무인정권은 1232년(고종 19) 강화천도를 단
행했다. 몽골은 2차 침입 당시 개경을 지나 남쪽 지역까지 공략했다. 몽골군은 남진 과정
에서 광주 일장산성日長山城(남한산성)을 2개월 동안 공격했으나, 부사 이세화李世華의 지휘 하에 전력을 다해 싸운 광주 주민들은 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광주에서 패퇴한 몽골군은 다시 남진해 수주의 부곡인 처인성處仁城(용인)을 공격했으나 백원현49)의 승려로 이곳에 입보해 있던 김윤후金允侯의 지휘 하에 적장 살리타이撒禮塔가 사살되자 부장 데구鐵哥가 인솔해 철수했다. 이후 김윤후는 몽골의 제5차 침입(1253년) 때 충주성에서 몽골군을 격퇴시켰다.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죽주竹州(안성)에서 방호별감 송문주宋文冑의 지휘 하에 8월 하순부터 9월 초까지 몽골군과 싸워 성을 수호했으며 1235년 지평현에서 야별초와 지평현 사람들이 몽골군을 습격해 다수를 살상하는 전과를 세웠다. 1256년 인주仁州(인천시) 경내의 소래산에서 대부도 별초군이 기습해 몽골군 100여 명을 물리치기도 했다.
6차 침입은 몽골군의 총공세였고, 고려 국내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치세력들은 태자의 입조를 통해 강화를 추진하는 한편, 강화협상에 걸림돌이 됐던 최씨 정권을 제거하려 했다. 1258년(고종 45) 3월 최씨 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가 문신 유경과 무신 김준 등에 의해 제거되고 최씨 정권은 붕괴됐다. 그리고 1259년 태자가 몽골에 입조함으로써 몽골군이 철수하고 강화교섭이 이루어졌다.
고려 태자가 몽골에 입조해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로부터 ‘불개토풍不改土豊’의 원칙을 받아냈다. 불개토풍은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뜻으로 몽골군이 세계정복 과정에서 왕조와 국가를 무너뜨리지 않고 그 나라의 명맥을 이어준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것은 이후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어려움에 처한 고려왕조를 보호하는 유효한 지침이 됐다.
그런데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이 유경을 제거한 후 스스로 교정별감이 돼 무인정권을 장악하고 몽골과의 강화를 반대했다. 1268년(원종 9) 김준을 살해하고 교정별감이 된 임연 역시 대몽강화를 반대했다. 임연은 대몽강화에 온건적인 입장을 지닌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창淐을 옹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몽골의 압력으로 실패했다. 임연이 죽은 이후 그 아들 임유무는 1270년(원종 11) 국왕 원종이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내린 출륙환도 명령을 거부했다. 임유무가 반대파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무인정권은 마침내 종식되고, 오랜 대몽항쟁도 끝나게 됐다.
무인정권 몰락 이후 고려정부는 왕정을 복구하고 개경으로 환도했지만, 아직 몽골에 대한 저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무인정권의 무력기반으로써 대몽항쟁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三別抄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항쟁을 했다. 삼별초는 배중손裵仲孫의 지휘 하에 왕족 승화 후 온溫을 국왕으로 추대해 새로운 정부를 결성했다. 이들은 대몽항쟁의 중심부였던 강화를 포기하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세력권 내에 두었다.
향촌사회에서는 삼별초의 항쟁을 지지하거나 이에 직접 참여하는 사례들이 나타났다. 향
촌사회가 삼별초 항쟁에 가담하게 된 것은 대몽강화 이후 향촌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던
사회경제적 폐단에서 비롯됐다. 또한 관리들은 피폐해진 국가재정을 보완하고 유지하기
위한 물자부담과 삼별초 항쟁의 진압과 일본정벌을 위한 경비부담, 대몽강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왕과 태자의 친조비용 등의 부담을 안게 됐다. 이러한 관리들의 부담은 곧 백성들
의 침탈로 이어졌다. 향촌사회의 실상에 가장 위협적인 것은 몽골의 침탈과 과중한 요구
사항이었다.
결국 삼별초의 항쟁은 무인정권 몰락으로 인한 위기의식과 몽골이라는 대제국의 비호 하
에 자행됐던 극심한 수탈정책으로 인한 고려사회의 총체적 모순의 표출이었다. 고려정부
와 몽골은 삼별초의 항쟁이 있자 강력한 진압책으로 진압하려고 했다. 마침내 1271년(원종
12) 고려정부와 몽골 연합군 토벌로 진도가 함락됐고, 그 일부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하에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했지만 1273년(원종 14) 진압됐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 하
에 들어가게 됐다.
몽고항쟁 시기에 평택지역과 관련이 있는 사례는 극히 일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1236
년(고종 23) 9월 죽주성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몽골군의 일부 부대가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충청지역에 진출했다. 충남 북부지역에 몽골군이 처음 침입한 것은 8
월 하순 몽골군 100여 명이 온수군(온양)으로부터 남하한 사실과 함께 다음날 몽골군이 남경南京·평택·아주牙州(아산)·하양창下陽倉에 주둔했다는 사실이 있어 평택지역이 점령
당했음을 알 수 있다.
(권만용_건국대학교 겸임교수)
[참고문헌]
『고려사』 권12, 세가 예종 원년 4월 병인조.
『고려사절요』 권15, 고종 4년 정월조.
『신증동국여지승람』 6권, 10권 광주목 명신 이세화조, 진위현조.
주석
49) 『신증동국여지승람』 6권, 10권 광주목 명신 이세화조, 진위현조, 진위현에 속한 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