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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천동柳川洞129)
유천동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이며 진위현과 양성현의 경계이기도 했다. 조선후기 행정구역으로 진위버드내(본유천)는 진위현(군) 병파면이었고, 직산버드내는 직산현, 양성버드내는 양성현 땅이었다. 1911년 『조선지지자료』에는 진위버드내를 상유천(웃버드내), 직산버드내와 새말을 하유천(아래버드내)으로 기록했다. 고을도 다르고 경계도 달랐던 세 마을이 하나로 통합된 것은 1914년이다. 양성 버드내와 소사리 일부, 동역리 일부, 직산버드내가 진위버드내로 통합돼 유천리가 됐다.
현재 유천동은 양성유천(1리)·본유천(2리)·황룡동·새말·직산유천(3리)으로 구성됐다. 유천1동 양성버드내는 해방 전후 20, 30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다. 유천동은 ‘병자년 장마 때 떠내려 온 마을’이라고 할 만큼 수해에 취약했다. 양성버드내는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에 양성현 영통면으로 기록돼 역사가 최소한 200년 이상이다.
유천2동 진위버드내는 본유천이라고 부른다. 진위버드내는 해방 전후 8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해방 이듬해인 병술년 물난리(1946년) 때 큰 피해를 입으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12호가 배미마을로 집단 이주하면서 현재는 60호 내외로 줄었다.
유천3동은 새말·황룡동·직산말로 구성됐다. 새말은 유천3동 마을회관 주변으로 1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황룡동은 철둑 아래 마을로 해방 전후 10여 호가 거주했다. 직산말은 조선시대 직산현 땅이었다. 이 마을은 해방 전후 12호에 불과했지만 옛 버스 종점이 있었고 유천교 입구에 검문소까지 있어 규모가 커졌다. 현재 유천3동은 전체 100호戶가 넘는다. 양성버드내와 진위버드내(본유천) 사이에 안터라는 작은 마을도 있었다. 안터마을은 100여 그루의 능수버들이 늘어선 마을이었지만 폐동됐고 남아 있던 버드나무숲은 1970년대 초 경지정리를 하면서 베어졌다. 주민들은 지금도 수해水害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1946년(병술년) 물난리 때 양성유천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본유천은 지대가 비교적 높아서 피해가 적었다. 유천3동 주민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 유천2동 본유천(2010) |
주석
129) 김덕배(77세), 2010년 1월 22일 유천2동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