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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동으로 원평동은 경부선 평택역 서쪽지역에 해당되는 평택동3리·평택동4리·통복동·군문동·신대동 일대다. 본래 이 지역은 경기도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와 충청도 평택군 군문리의 일부였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철도 평택역이 설치되고 새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평택리·통복리·신대리·군문리로 편제됐다. 평택리의 도시규모가 확대되고 1931년 4월130) 병남면이 평택면으로 바뀌면서 면面의 중심으로 변모했다. 또한 진위군청이 이전해오고 경찰서·우체국·금융기관·교육기관·상업시설 등이 집중되면서 평택면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1938년 10월 군郡의 명칭이 ‘평택군’131)으로 개편되고, 평택면이 읍邑으로 승격되면서 평택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중심지가 됐다.
1940년대 초 원평동의 행정기관은 평택군청·평택경찰서·평택읍사무소·평택세무서·평택우체국·의용소방대(1914년 발족)·경성지방법원 평택출장소(1918년 개원) 등이 있었고, 평택역·기호농조·곡물조합 같은 공공기관과 금융조합·상업은행 평택지점 등의 금융기관도 있었다.
원평동은 해방 이듬해(1946) 큰 수해水害를 겪었다. 일명 병술년 물난리다. 본래 원평동은 안성천과 가까워 수해에 취약한 도시구조를 갖고 있었다. 일제는 수해방지를 위해 도심 주위에 직사각형 형태의 제방을 축조했다. 하지만 1946년 6월 20일부터 26일 사이에 무려 426㎜나 내린 집중호우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평택지역에서는 유천동·군문동·원평동(당시 평택동) 등 안성천 주변마을이 침수되고 11명이 사망했으며 735ha의 경작지가 유실됐다. 또 교량 26개, 오산-평택 사이의 도로 및 철로도 유실돼 교통이 마비됐다. 각종 관공서와 상가, 시장이 밀집됐던 원평동은 피해가 상당히 컸다. 당시 수해를 경험한 상인들은 물이 지붕 위까지 잠기고 상점에 보관 중인 상품들이 모두 못쓰게 돼 손해가 많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평택지역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국도 1호선·38호선·45호선·39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로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로였으며 인민군이 남진하는 길목이었다. 적봉리·서정리·세교리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전개됐다. 유엔군은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할 목적으로 1950년 7월 4일 평택역과 원평동 일대에 폭격을 가했다. 폭약을 싣고 평택역에 정차했던 화물열차가 폭격으로 인해 폭발하면서 101명의 군인들이 폭사하고 시가지가 재기불능 상태로 파괴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물러간 뒤 원평동 주민들은 도시재건을 위해 힘을 모았다. 건물이 파괴된 철도역을 복구했고 평택군청과 평택경찰서는 옛 평화병원 건물과 공주여관 등을 전전하며 임시 관청으로 사용했다. 폭격으로 파괴된 평택장도 시장로터리 부근의 철도 건널목(통복지하도) 일대에 노점을 형성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시의 중심을 이동하자는 논의가 전개되었고, 1953년 경부터 수해에도 안전하고 전쟁의 피해가 적은 철도 동쪽으로 옮기게 됐다.
한국전쟁 뒤 도시가 철도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옛 평택리는 평택 4·5·6리로 편제됐고 철도 동쪽은 1·2·3리로 구분됐다. 부서진 도시는 오랫동안 방치됐다.132) 폐허의 터 위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평택장 주변의 시민들과 도시빈민들 그리고 전쟁피란민들이 많았다. 폭격 피해가 적었던 본정통 서남쪽 주민들은 여전히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했지만 전쟁 뒤에 정착한 사람들은 생계가 막막해서 대부분 일용직이나 소작을 지었다. 철로 근처의 옛 역 광장 앞에는 대동연탄 같은 연탄공장이 자리 잡았고, 철로주변 용잔을 중심으로 허름한 주택이나 가게들이 들어섰다. 통복지하도 부근에는 제제소·건재소·마방·주막·떡방앗간 같은 상가가 남아서 옛 도심의 명맥을 유지했다. 군문동은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마을로 반복적인 수해를 입는 마을이었다. 포구마을로 만성적인 수해를 겪던 신대동 마을들은 1974년 아산만방조제 건설 이후 경작지가 확대돼 이전보다 상황이 다소 나아졌다.
복구가 안 되고 옛 도시로 남은 원평동에는 1974년 7월 평택읍 서부출장소가 설치됐다. 1986년 평택이 시로 승격하면서 기존의 평택동에서 분리해 ‘평택시 서부동’으로 편제해 평택리·통복리·군문리·신대리를 관할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평택4리는 1·2·21·22통으로 편제됐고, 평택5리는 3·4·5·6·7통, 평택6리는 8·9·10통이 됐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곳이 옛 평택시의 발상지이므로 ‘원평동’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2년 6월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서부동을 ‘원평동’으로 고쳤다. 현재 원평동은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좁은 골목길이 확장되고 2009년 민자 역사로 개통한 평택역의 서쪽 출입구가 원평동 방향으로 조성되면서 도시가 발전하고 있다.
통복동에 삼성아파트, 군문동 사이에 군문주공아파트가 들어섰으며, 1969년 우시장 자리에 평택초등학교가 설립됐고, 1999년 군문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동네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원평동의 면적은 5.46㎢(평택시 전체면적의 0.01%) 인구는 5,743세대 13,383명이다. 이 가운데 남자는 6.765명, 여자는 6,618명이다. 행정구역은 20통 107반으로 편제되었으며, 교육기관은 평택초등학교와 군문초등학교, 금융기관은 평택농협 원평지점, 의료기관 4개소 등이 있다.
| 일제강점기 1등 도로(국도 1호선)와 원평동(2013) |
| 일제강점기 평택군청과 경찰서 터(2013) |
주석
130) 『동아일보』, 1931년 4월 13일.
131) 『매일신보』, 1938년 9월 23일.
132) 평택시문화원 향토사연구소편, 『향토사료집 제1집』, 평택시문화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