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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지에 나타난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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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평택의 기본은 진위와 평택이다. 진위라는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됐고, 평택은 고려 시대에 처음으로 기록됐다. 진위 일대의 초기 기록은 부산현釜山縣, 평택 일대는 하팔현河八縣이었다. 이들 기록은 『삼국사기』에 보인다.
먼저 진위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51년(조선 문종 원년)에 편찬된 『고려사』 지 리지는 『고려사』 137권 중 56∼58권에 편제돼 있는데, 시간적으로는 918년에서 멸망한 1392년까지 474년간 각 주현의 연혁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고려사』 지리지는 전국을 개성과 5도(양광도·경상도·전라도·교주도·서해도)·양계(동계·북계)로 나누고 그 아래 주명·부명·군명·현명을 나열해 상호 통속統屬 관계만을 밝혔다. 현 이하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군현의 승강 이외에는 기록돼 있지 않아 성씨 및 군현 이하의 행정구역에 대한 지명이 많이 누락돼 있다.
『고려사』 지리지의 진위현에 관한 기록은 “본래는 고구려 부산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진위현으로 지명을 변경했다. 고려시대까지 유지됐으며 수성군의 속현이었다”는 내용 이다. 고려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령으로 승격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고려사』의 기록을 기본으로 해 이후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 나타난 진위 기록은 별 차이 가 없다.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의 평택은 진위현과 평택현으로 각각 나누어 기록돼 있다.
우선 진위현은 수원도호부 관할이었으며, 현령을 두었다. 옛 고구려 부산현에서 비롯됐 다는 간단한 이력이 기록돼 있다. 중요한 것은 세종 6년 송장松莊이 진위현에 편입됐다는 점이다. 진위현은 동으로는 양성(4리), 서로는 수원 소내천(7리), 남으로는 수원 영신현(7 리), 북으로는 수원 송족(6리)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호구는 221호, 535명이었으며 군 인으로는 시위군 10명과 선군 즉 해군 51명 정도였다. 토성으로 이·김·최씨 등이 었고, 사라진 망성은 유·송씨 등 2성, 속성은 직산에서 이주해 정착한 조씨, 그리고 새로 편입된 송장의 토성 유씨가 있다. 땅은 메말랐으며, 간척한 논이 2,841결로 논과 밭이 반반 정도였다. 주요 농산물은 오곡 외에 조·팥·메밀·녹두·참깨·뽕나무·마 등 이 생산됐으며, 약재로는 황금黃芩이 유명했다. 관내에 청호역이 있었는데, 송장이 편입되 면서 진위현에 속하게 됐다.
평택현은 청주목 관할이었고 태종 13년에 현감을 두었다. 동과 서로는 직산(각 6리와 8리), 남으로는 아산(10리), 북으로는 수원(10리)과 경계를 이루었다. 호수는 179호, 인구는 704명이었으며, 군인은 시위군 8명, 진군 3명, 선군 78명으로 군사적으로는 진위현보다 중요하게 인식됐다. 토성은 이·임·박·전 등 4성, 망성은 손·전 등 2성, 촌성은 박씨였다. 토양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었으며, 간척한 논이 2,234결로 논이 5분의 3을 차지했다. 주요 농산물은 벼·피·콩·보리·밀, 약재는 황금이 유명했다. 진상품으로는 족제비털이 있었다. 관내에 화천역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은 각 도의 연혁과 총론·관원을 적은 후, 목·부·군·현의 연혁, 관원·군명·성씨·풍속·형승·산천·토산성곽·관방關防·봉수·누정·학교·역원·교량위치·불우·사묘·능묘·고적·명환名宦·인물·시인의 제영題詠 등의 순서로 기록돼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이후에 증보된 것이다. 인물에는 효자·열녀가 포함돼 있다. 군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특히 강조된 내용은 연혁·성씨·산천·역원·고적·인물 등이다.
연혁에서는 시대에 따른 각 군현의 지명 변화, 행정구역 변천 과정 등을 밝히고 있다. 성씨는 토성土姓·내성來姓·속성續姓 등으로 구분해 기록했고 역사상 유명한 학자·고승·충신·무장·효자·열녀 등을 다룬 인물조와 관계가 깊다. 산천조는 명산·하천·바다·호소·나루터 등의 위치를 읍을 기준으로 거리와 방향을 기록했고 시문으로 과거의 경관을 묘사했다. 역원제와 봉수제는 왕명의 전달, 긴급 군사 정보의 송부, 공무 여행자와 관물 수송 등 전제군주제 하에서 행정상의 중추신경 구실을 했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됐다. 봉수와 역원의 위치는 읍을 중심으로 방위와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역은 찰방역과 일반역으로 나누었다. 찰방역의 경우 그 소속 역명을 열거했으며, 주요 역원은 그 시설과 연혁 등이 기술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전기 지리지의 집성편集成編으로 책 안에 실린 지도와 함께 조선 말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 지리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평택도 진위현과 평택현이 중심이다. 진위현은 동으로는 양성현(13리), 서로는 수원부(12리), 남으로는 직산현(37리), 북으로는 용인현(33리)을 경계로 했으며, 서울과는 118리 정도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은 고구려 부산현, 연달연곡, 금산, 송촌활달 등 옛 지명과 신라 이후 진위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태조 7년에 충청도에서 경기도에 편입됐다. 관원으로 종 5품의 현령 1인, 훈도 1인이 있었고, 성씨로는 진위현에 김·이·유·최·송씨 등 5성이, 영신에는 김·최·오·황·이씨 등 5성, 송장은 이·유씨 등 2성이 토성이었다. 형승은 남과 북으로 길이 통했으며, 3도의 요충이 되는 지역이라고 평가했다. 산천으로는 동쪽의 부산釜山, 무봉산, 천덕산 등 3개의 산이 있으며, 강은 남 쪽으로 장호천이 흘렀다. 진위현의 토산품은 붕어, 게, 지황地黃 등이었다. 궁실은 객관, 누정으로는 부산정, 학교는 향교, 역원은 장호원·이방원·백현원·갈원, 불사는 만기사, 사묘는 사직단·문묘·성황사·여단, 고적으로는 영신폐현·송장부곡·천장부곡 등을 간 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특징은 진위현에 편입 폐현된 영신현, 송장 부곡, 천장부곡을 고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영신현은 원래 양성현에 속했는데 조선 태 종 때 수원부에 속했다가 세종 15년 진위현에 속하게 됐다. 송장부곡은 수원부에 속했다가 세종 6년 진위현에 속했다.
평택현은 동으로는 직산현(10리), 남으로는 아산현(8리)과 천안현(2리), 서와 북으로는 수원부(각 20리와 10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울과는 124리 정도 떨어져 있다. 건치 연혁은 고래古來로부터 하팔현으로 천안부에 속했다가 태종 13년 현감을 두는 독립현이 됐 다. 관원은 현감과 훈도 각 1명을 두었고 연산군 때 경기도에 잠시 속했다가 중종 초에 다 시 충청도로 환원됐다. 토성은 이·임·전·손·박씨 등이다. 산천은 성산城山, 오을미곶포五乙未串浦, 시포市浦, 신덕포新德浦 등이 있었는데, 포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토산품으 로 붕어·숭어·지황 등이 있다. 누정은 객사 북쪽에 있는 관가정, 향교, 역원으로는 화천 역과 상원이 있었으며 사묘는 사직단·문묘·성황사·여단 등이 있다. 고적으로 백량부곡 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특징은 효자 박영朴寧, 박서생朴瑞生·노숙동盧叔仝·서거정徐居正의 제영을 추가했다는 점이다.



여지도서


『여지도서』는 1757년(영조 33)∼1765년에 각 지방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 읍지邑誌이다. 각 읍지의 내용구성은 강역疆域·방리坊里 (호구戶口 포함)·도로道路· 건치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형승形勝·성지城池·관직官職·산천山川·성씨姓氏·풍속風俗·능침陵寢·단묘壇廟·공해公廨·제언堤堰·창고倉庫·물산物産·교량橋梁·역원驛院· 목장牧場·관애關阨·봉수烽燧·누정樓亭·사찰寺刹·고적古蹟·총묘塚墓·진보鎭堡·명환 名宦·인물人物·한전旱田·수전水田·진공進貢·조적糶糴·전세田稅·대동大同·봉름俸廩· 군병軍兵 등이다.
『여지도서』는 『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방리·제언·도로·전결田結-한전旱田·수전·부세賦稅-진공進貢·조적糶糴·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군병軍兵 등 항목이 첨 가돼 사회·경제적인 내용이 강화됐다. 이러한 체제는 16세기 후반 이래 새로운 읍지 편찬경향을 정리하고 종합한 것으로 18세기 읍지의 종합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방리·도로·부세에 관한 제 조항 및 각 읍지의 첫머리에 수록된 채색지도이다. 일반적으로 읍지의 제일 첫머리에 기재하던 건치연혁조보다도 방리조를 앞에 위치시켜 당시 읍지 편찬자들이 이를 중시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진위현은 수원부 진관 관할 아래 있으며, 동으로는 양성현(10리) 북으로는 용인현(10리) 서로는 수원부(20리) 남으로는 평택현(30리)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울과 거리는 120리로 하루 반나절 정도 걸린다. 방리를 살펴보면 마산면(상리·하리), 성북면(동천리·청호리·갈곶리·가곡리·준목리·견산리), 서면(궁리·신리·금암리·마두리·내천리·야막리), 탄현면(상리·하리·사리·오리), 송장면(동령리), 여방면(사창리·갈원리·서재리·율재리·영신리·방효동), 병파면(통복리·비전리·어리남리), 성남면(잔교리), 고두면(동청리·옹정리), 현내면(동리·서리) 등 10개면으로 구성됐다. 호수는 1,801호로 남자 2,527명과 여자 2,249명이었다.
도로는 남북으로 이어진 삼남길이 큰길이며, 동으로는 양성까지 20리의 작은 길과 서로는 수원부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 있다. 관원은 음관 6품의 현령 1명,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3명, 파총 1명, 초관 5명, 기패관 12명, 아전 15명, 지인 9명, 사령 7명, 관노 7명, 관비 8명 등 총 71명이었다.
산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대폭 늘어났는데 진위현의 진산인 부산釜山을 비롯해 무봉산, 천덕산(일명 다락산), 부락산 등 산과 장호천, 귀천, 서천, 토현천, 내천, 통보천 등이 포함됐다. 진위현의 풍속은 무인들과 선비가 많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해 상공업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상인이나 공장工匠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였다. 궁실은 객사 외에 아사衙舍, 창고, 해창 등이 있고, 제언堤堰으로는 사발동, 가은산, 진가리, 눌리, 금각, 오근천 등이 있다.
이외 『여지도서』는 한전旱田, 수전水田, 조적糶糴,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俸廩 등도 기록하고 있다. 군병으로는 균역청 선무군관 76명을 비롯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수어청, 병조, 공조, 총융청, 감영 등 모두 1,973명이다.
평택현은 홍주 진관에 속하며 동으로는 직산현, 북으로는 수원부, 남으로는 아산현, 북으로는 진위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울과는 160리로 하루 반나절 정도 걸렸다. 방리는 읍내면(향교리·대정리·객사리·빙고리·누리·두리·상궁리·하궁리·군문리), 동면(남산리·추팔리·노련리·외야리), 남면(안현리·송당리·개화리·농관리·탁천리·대사동·서근보·노산상리·노산중리·노선하리·신포리), 서면(경정리·대추리·동창리·내리·염정리·야리), 북면(근내동·원정리·작정리·흑석리·신리·야리), 소북면 등 6개면으로 구성됐다. 호수는 1,395호, 남자 2,839명, 여자 2,883명이었다. 도로는 동대로, 남대로, 서소로, 북소로 등 크고 작은 4개의 길이 있다. 관직은 음관 6품인 현감 1 명, 좌수 1명, 별감 2명, 현군관 30명, 아전 18명, 지인 16명, 사령 21명, 관노 23명, 관비 26명 등 모두 136명이었다.
산천은 주산인 왕주산이 있으며, 하천은 소사천·염작천이 있었다. 풍속은 대체로 부드 럽고 순해 과감히 떨쳐 일어나는 기운이 없다고 평가했다. 이는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해 글공부나 무예에 힘쓰거나 마음에 둘 염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묘에는 포 의사가 추가됐으며, 제언은 탄천제·신직제·노양제·신제·마구제 등이 있고 특산물은 벼를 비롯해 콩·붕어·가물치·지황·황금·택사·더위지기 등이다. 누정으로는 관가 정·도두정·서장자, 그리고 사찰은 망한암이 있고, 인물로는 홍익한·이성길·권임길· 방덕룡·이운룡·방일찬·방이흠·박영과 효부 유씨, 열녀 심씨와 사비私婢 천금 등을 기 록하고 있다. 군병은 좌영·병영·순영·안흥·병조·금군보·보충대 등에 소속된 966명 이다. 특히 『여지도서』에는 평택현의 옛 이름이 팽성부彭城府라고 밝히고 있다.



진위읍지


『진위읍지』는 1843년 처음 편찬된 읍지로 1872년, 1891년, 1899년 네 차례 편찬됐다. 편찬시기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구성은 사방도리四方道里·읍명고호邑名古號·진관鎭管·호총戶摠·결총結摠·환총還摠·군총軍摠·산천山川·월포越浦·제언堤堰· 축보築洑·역원驛院·성지城池·충현묘소여비갈忠賢墓所與碑碣·충효열인忠孝烈·고적古蹟·사찰寺刹·기우제단祈雨祭壇·장시場市·점막店幕·관직官職·토산土産·풍속風俗·제영 題詠·명환名宦·선생안先生 등으로 돼 있다.
1843년 편찬된 『진위읍지』는 건치연혁, 강계, 장면, 형승, 산천, 관방, 성곽, 봉수, 제언, 방보, 관우, 누정, 학교, 역원, 불우, 고적, 성씨, 인물, 사실, 호총, 군총, 환향총, 결총 등 으로 구성됐다. 이 『진위읍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편찬됐다. 건치연혁에서 새 로운 것은 남양진관 관할이었다는 점이다. 진위에서 서울까지는 120리로 『신증동국여지 승람』의 118리보다 2리 더 멀다. 방보가 새로 추가돼 황생보·중보·황이보·생현산보· 금복보·견산보·토현보·신보·대야소보·미시보·익홍보·우두보·백량보·방시천 보·장경천보 등 15개의 크고 작은 저수지가 있다. 이는 벼농사가 확대됐음을 알 수 있으 며, 또한 간척이 적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의 남쪽에 빙고氷庫가 있었는데 없어졌 다고 했다. 신증편으로 새로 보완된 것은 인침담印沈潭·조산造山·모정령茅亭嶺·원정령猿亭嶺·안처선의 처 최씨묘·최수성의 묘·이세준의 묘·이연손의 묘가 추가됐다. 인물도 새로 추가된 것이 많았는데 최유림·최윤신·소흡·원균·원사림·권사공·남명익·이성부·우예순의 처 임씨·언용의 처 양녀 설애상·홍복성의 처 이씨·황효원 등이 보완됐다. 특징적인 것은 병자호란 당시 정조를 지킨 여성들이 기록됐다는 점이다. 진위현의 총호수는 2,181호, 인구는 7,429명이다.
1872년에 편찬된 진위읍지의 특징은 장면掌面 즉 면의 명칭이 변경됐다는 점이다. 기존 10개면이 13개면으로 증가했다. 기존의 성북면·서면·탄현면의 명칭이 사라지고 일북면·이북변·일서면·이서면·일탄면·이탄명 등 새로운 명칭이 보이는데, 이는 성북면·서면·탄현면이 각각 분할된 것이다. 새로 보강된 것은 연정蓮亭·유명교有名橋·덕암명기德巖名基 등과 최희효·언팽수·원연·소응종·기만헌·최진운·최정운·최충운·이현·소정진·정이창·윤창구·이상우·최형구·강호석·소형우·한상현·최창운·최형운·최진창·최치후·정완·이만영·최명운·이준·조일범·한세상·최치영·이후성·이천근·이인석·이석근·최진한·박충립·우빈 등 인물이다. 호수는 2,051호, 인구는 8,519명이다.
1891년 편찬된 진위읍지는 현령이 없다는 것과 옛 명칭이 부성釜城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동안 ‘부산‘이었던 것이 ‘부성‘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그리고 마산면이 읍내면으로 변경됐다. 제언편은 기존의 제언에 부연 설명이 많이 보완됐다는 점이다. 고적으로 원천猿泉·최유림 묘·최윤신 묘·최수정 묘·이세준 묘·이연손 묘·소흡 묘·원균 묘·이성부 묘·원사립 묘·이준 묘 등 분묘가 새로 추가됐다.
1899년에 편찬된 진위읍지는 진위현이 남양부 진관 관할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읍내면이 현내면으로 변경됐고 월포越浦의 군문포·황구포·해창포·고잔포, 점막店幕의 읍내점·청호점·견산점·신제점·우곡점·갈원점·통복점 등이 새로 추가됐다. 영조가 온양에 행차할 때 남긴 제영도 포함됐다.



팽성지


『팽성지』는 1871년 편찬된 평택읍지다. 『팽성지』의 내용은 건치연혁·별호·경계·선생안·면·관해·객사·산천·둑과 방죽·학교·총묘·성씨·인물·사례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치연혁에 옛 이름이 하팔현이고 고려시기에 평택현으로 개칭됐다. 이후 평택현의 연혁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선생안은 1610년까지 유림 조수륜을 비롯해 64명이 수록돼 있다. 면은 읍내면(향교리·대정리·보십리·객사리·누촌·하신대리·상신대리·두리·상궁리·하궁리·군물리·신덕리·창월리), 동면(외야동·노련리·추팔리·남산리), 서면(경정리·대추리·동창리·내리·곤지두), 남면(서정자·안현리·송중리·송하리·석교·대사동·개화리·서근리·월정리·상리·중리·노하리·신성리), 북면(신리·근내동·원정리·원봉·흑 설리·호치동·신오포), 소북면(안두언·안언·동언·상대리·중대리·교포) 등 6개 면 으로 구성됐다. 나루는 곤지진, 포구는 삽교포·통복포·시포, 저수지는 감동지, 우물은 대정, 그리고 토성土城이 있다. 뚝과 방죽은 탄천제·신직제·신제·대야보·서근보·노 양제 등이 있고 중국 사신과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을 드나들 때 머물던 서정자가 있었다. 사찰은 망한사, 역은 화천역, 총묘는 방륜의 묘 등이 있다. 인물은 홍익한·이성길·권임 길·방덕룡·이운룡·방일찬·방이흠·박영·열녀 청송심씨·열녀 정씨·열녀 천금·우 남양·박천건·신식·이덕함·홍윤성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