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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령과 지방통치 기구 - 동헌·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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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도(18세기)에 수록된 평택현

| 해동지도(18세기)에 수록된 평택현 |



수령은 조선시대 중앙정부가 전국 군현에 파견한 관리다. 이들은 관할 지역 내 가장 핵 심적인 인물로 사법권·행정권·징수권·군사권 등 막대한 권한을 가졌다.54) 수령직은 외직外職으로 중앙정치권에서 보면 주변권력이어서 관리들은 수령직을 기피하기도 했다.
330여 개에 달하는 군현에 수령으로 보낼 재원들을 충원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정부에서는 유능한 인재들을 수령으로 확보하기 위해 고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수령은 담당하는 고을에 따라 부사· 목사·군수·현령·현감 등 종2품에 서 종6품까지 차등적으로 파견됐다.

진위현은 종5품의 현령이나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됐고, 평택현은 현감이 수 령이었다. 조선의 수령은 임지에서 7 가지 업무에 힘써야 했다. 이것은 수 령의 매년 6월과 12월의 고과를 평정 하는 기준이 될 만큼 중시됐다. 내용 은 농상성農桑盛(농업과 잠업을 장려), 호구증戶口增(인구 증가), 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 군정수軍政修(군역을 바르게 부과), 부역균賦役均(세금을 공 평하게 부과), 사송간詞訟簡(재판을 줄 임), 간활식姦猾息(간사하고 교활한 자 들의 횡포를 없앰) 등이다. 이를 수령 칠사라 하는데 『조선왕조실록』 1483년 (성종 14) 9월 기사에는 평택 현감으로 나가는 변징원卞澄源과 국왕이 수령칠 사에 대해 나눈 기록이 실려 있다.

동헌은 조선시대에 관찰사·부사·목사·군수·현감 등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정청政廳으로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다.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內衙와 구분해 보통은 동편에 있기 때문에 동헌이라 불렸는데, 공간 구성은 상류층 주택과 거의 같았다. 아사衙舍·군아郡衙·현아縣衙·시사청視事廳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우리말로는 ‘마을’이라고도 한다. 군현의 크기에 따라 건축 양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일반적으로 3∼4층의 석축 위에 정면 6∼7칸, 측면 4칸의 목조 주심포 구조에 팔작지붕을 한 장중한 형태였다. 보통 중앙 3칸은 마루로 된 대청이고 양쪽 한두 칸은 온돌방으로 꾸며졌다. 건평은 40∼50평이 일반적이다. 동헌은 담이나 행랑으로 다른 관아와 격리돼 협문夾門으로 통할 수 있게 해 건물 배치만으로도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진위 동헌은 일제강점기 당시 모두 파괴돼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의 진위초등학교 터로 알려져 있다.55) 1843년 『진위읍지』에는 동헌의 크기에 대해 나와 있지 않고 본래 현의 동편으로 3리에 있었으나 언젠가 옮겼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불타 현령 남두극이 1644년에 개축하고 1731년에 다시 개축했으나 계년癸年(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음)에 내아內衙가 무너졌다. 1840년 현령 황종림이 담을 개축했다한다고 한다. 동헌의 당호는 전하지 않고 있다. 평택현의 동헌도 남아 있지 않다. 『읍지』의 지도와 현재의 지형을 대조해 보면 현재 부용초등학교와 동쪽의 성림교회 사이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동헌의 당호는 통치이념이나 주변풍경을 표현한 것들이 많다. 평택현 동헌의 당호는 『팽성지』의 제영題詠에 실린 ‘택국금헌적澤國琴軒寂’이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다. ‘금헌琴軒’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당호는 일반적으로 세 글자이기 때문에 ‘국금헌國琴軒’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헌의 가장 일반적인 당호가 ‘제금당’이었는데, 평택현의 동헌도 그냥 ‘제금당’이라 불렸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 관아 중 가장 중요한 곳 가운데 하나인 객사는 수령이 왕명을 대행한다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수령이 부임하면 가장 먼저 객사에 들러 그곳에 모시고 있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궐패闕牌’에 배례하게 된다. 또한 매달 보름마다 수령이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거나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국가와 국왕의 통치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동헌에는 없어도 객사 앞에는 반드시 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진위현 객사는 현재 비록 남아 있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하륜河崙의 기문과 서거정徐居正의 중수기가 있어서 조선 초기에 이미 객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병 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에게 손상을 입어 1646년 현령 이산뢰가 동익헌과 서익헌을 중수 했고, 1660년에 송박이 중대청을 중수했다. 1665년 현종이 온양온천으로 행행行幸할 때는 붉은 흙으로 단장했다. 1791년 현령 조윤식이 개축했고 1840년 현령 황종림이 다시 수리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돼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평택현 객사는 평택현의 옛 지명을 붙여 ‘팽성 객사’라 불린다. 1489년(성종 19) 평택 현 감 송계흥宋繼興의 「객사기문」에 ‘임소에 도착해보니 관사는 초라하고 담은 무너져 백성을 다스리려고 해도 앉을 자리가 없고, 손님이 와도 묵을 집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객 사라도 새로 지어야겠다는 뜻을 품게 됐다’라는 기록이 있다. 『팽성지』 제영편에 실린 이 안눌李安訥(1571∼1637)의 시 가운데 ‘나무는 태평 초기부터 늙었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이 객사의 은행나무를 가리킨다는 것으로 보아 평택현의 객사가 조선 초기부터 있었 음을 알 수 있다.56)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때는 이미 폐허가 된 듯하다. 객사가 다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수령들의 노력 때문이었 다. 심익선 현감이 1665년(현종 6)에 규모를 넓히고 좌우의 익헌을 갖추었으며 이순영 현 감(1700∼1706) 때 중대청 및 동헌과 서헌도 수리해 법도에 맞게 했고 1801년(순조 1년)에 도 중수가 있었다.

팽성 객사는 일제강점기에 한동안 양조장으로 사용됐고 그 뒤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다가 1994년 평택시에서 매입해 실측조사를 하고 해체 수리해 복원했다.



주석

54) 이희권, 「조선후기 수령과 그 통치기능」 『전라문화논총』 2, 1988.
55) 진위초등학교에 가보면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학교 뒤쪽으로 아주 넓은 공간이 있어서 진위현 관아는 거의 진위초등학교에 있었고, 객사만 진위면사무소 앞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6) 1872년 평택현 지도를 보면 객사에 나무 한그루가 그려져 있는데 아마 이 은행나무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이 은행나무의 자취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