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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의 배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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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의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 실패가 먼저 지적된다. 조선왕조의 기본적인 외교정책은 사대·교린정책이었다. 교린정책은 주로 일본의 해적이었던 왜구를 막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돼 회유와 견제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15세기까지는 왜구에 대한 회유와 견제가 적절히 안배되면서 일본에 대한 교린정책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됐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와 왜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1510년(중종 5) 4월에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亂은 관군에 의해 진압됐지만 이후 일본인과의 무역 등 접촉을 크게 줄였고 물자가 부족해진 왜구들이 다시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555년(명종 10) 발생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은 큰 피해를 주었다.

조선왕조는 일본 정권과의 외교 교섭에도 실패했다. 1589년(선조 22) 9월, 일본의 거듭된 요청에 의해 조선에서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으로 구성된 통신사를 파견했다. 1591년 1월에 귀국한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정반대의 보고를 올리는 등 견해가 일치하지 못해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의 군사력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15세기에 오위五衛 제도를 근간으로한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는 16세기에 들어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농민들이 현역에 복무하는 대신에 포를 내고 군역을 면제받는 군포제軍布制가 시행되자 군사력이 크게 줄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방의 방위체제를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개편했다. 조선전기의 오위체제에 기반 한 지방의 방위체제는 진관체제鎭管體制였지만 군포제 운용으로 농민들의 동원이 어려워지자 제승방략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했다. 즉 남방에 왜구가 발생할 경우, 중앙에서 파견하는 장수가 중앙군과 무기 등을 가지고 내려가 병사·수사와 나란히 군사를 나누어 갖고 대응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을 맞이하자 급격히 북상하는 적의 진격을 막을 만큼 재빨리 서울의 장수를 파견할 수가 없었다. 또한 제승방략은 국지전에는 유리할 수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같은 전면전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명나라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기에 대규모 군사를 보유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정치·외교·군사상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민심이었다. 16세기 이래 민심은 조정을 떠나고 있었다. 1560년대 임꺽정 같은 도적이 등장하면서 표출되기 시작한 민심의 불만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폭발하고 있었다.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하는 선조의 행차에 백성들은 돌멩이를 던지면서 분노를 표출했고 의병을 모집하러 함경도 지방으로 떠났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백성들의 손에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지기까지 했다.

16세기 일본은 일종의 내전상태인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전개됐다. 전국시대 통일을 추진한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고 최종적으로 통일을 완성한 사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러나 이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각 지역 영주인 다이묘大名 세력들의 군사력이 여전히 위협 요소가 되고 있었다. 조선침략은 자신의 권위도 확인시키고 각 다이묘들의 군사력도 소모시키려는 목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일본 통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전투경험으로 일본군의 전투력은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스페인 등의 상인들을 통해 전래된 조총은 빠른 속도로 보급됐고 이에 따라 전술에도 변화가 있었다. 재래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 총에 큰 공포를 느끼고 전쟁초기에는 전의마저 상실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군사를 나눠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군사를 이남 각처에 주 둔시켰다. 일본군의 급속한 북상에 의주까지 쫓긴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함과 동시에 구원 병을 요청했다.

비록 일본군이 평안도 평양과 함경도 회령까지 진격했지만 실제로 점령하고 주둔한 지역 은 몇몇 주요 도시에 불과했다. 각 지방의 양반들은 의병부대를 곳곳에서 조직해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는 등 후방을 괴롭혔다. 경상도의 곽재우,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 등 의병장 휘하에 크고 작은 의병부대가 각 지방에서 일어나게 됐다.

또한 임진왜란 과정에서 전세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수군의 승리였다. 이순신 이 이끄는 전라도 수군은 일본 수군을 물리치고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했다. 일본 수군은 서해 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평양까지 올라간 일본 육군은 서해안을 통한 군수 보급이 불가능해져 더 이상 북상할 수 없었다.

그 사이 조선의 구원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조공-책봉 관계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국제질 서를 유지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명나라 군대는 빼앗겼던 평양성을 공격해 수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한양 수복을 위한 전초전인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한 후부터 는 일본과의 전면전을 꺼렸다. 명나라의 참전은 다른 의미에서 조선이 전쟁에서 소외되는 과정이었다. 당시 반란 등의 문제로 내부사정이 복잡했던 명나라는 전쟁을 최대한 빨리 종 식시키려고 시도했다. 이에 따라 명은 일본과의 화의 교섭에 나서게 된다. 일본도 군수 부 족으로 인해 전력손실이 계속됨에 따라 북진의 여력을 상실해 강화회담에 응했다.
화의에 대한 각국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조선은 강화회담에 원칙적으로 반대 입장이었 으며, 일본 측은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는 등 터무니없는 주장을 계속 했다. 결국 회담은 결렬됐고 1597년 일본은 다시 한 번 전열을 가다듬고 재침공을 시도한 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당시 점령에 실패했던 전라도를 초기에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침 입해 명나라 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소사평素沙坪 전투에서 결정적으 로 패배하게 된다.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후퇴해 성을 쌓아 주둔했으며 장기전을 준비 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철수를 결정했다. 명군은 뇌물을 받고 일본군의 퇴로를 내주었지만 이순신과 조선군은 퇴각하는 적을 추적해 큰 승리를 거뒀다.



소사평이 기록된 해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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