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 역사

본문 바로가기
역사 > 근대 >평택지역의 민족운동 >3·1운동>개관
■ 개관

본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 운동은 일본제국주의의 식 민지배에 대한 자주독립운동이자 민족민주운동이었다. 무자비한 무력탄압으로 인해 목표 를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민족단합으로 일제에 항거해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을 새로 인 식하게 했다.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정신을 3·1 운동에서 찾게 됐으며 대한민국 헌법전 문前文에도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3·1 운동은 외부적으로 세계 제1차 대전의 종식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 창과 러시아혁명, 내부적으로 일제의 무단통치와 고종의 죽음, 그리고 도쿄유학생의 2·8 독립선언으로 인해 독립의지가 촉발됐다.

3·1 운동은 1918년 말부터 준비됐다. 손병희를 대표로 한 민족대표 33인은 마침 고종황 제의 인산(장례식 운구행사)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 해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 위운동을 펴기로 했다. 또 각 지방에도 미리 조직을 짜고 독립선언서와 함께 운동의 방법 과 날짜 등을 전달해 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보문, 미국대통령과 파리강 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낼 의견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비용과 인쇄는 천도교측이 맡아 2월 27일 밤 보성사에서 2만 1천장을 인쇄해 은밀히 전국 주요 도시에 배포했다.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식이 폭력화할 것을 우려해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보해 자진 체포당했다. 한편, 파고다 공원에서는 5,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당시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현덕면 권관리 출신 이병헌은 천도교중앙총부에서 활동했고, 2월 27일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천도교대교당으로 비밀리에 운반했다. 3월 1일 태화관과 탑골공원의 연락책을 담당했고 이후 수원만세운동을 모의했다. 화성군 우정면과 장안면 만세운동을 지도했으며 평택지역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고취시켰다.108)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철도라는 교통망을 따라 확산됐다. 둘째, 준비세력들이 전국 주요도시에 연락망을 정하고 선언서를 발송했기 때문이다. 셋째,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3·1 운동을 경험한 지방민에 의해 확산이 가능했다. 넷째, 3·1 운동은 상대적으로 일제의 감시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종교인에 의해 준비됐고 학생과 농민의 가담으로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됐다.109)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기록을 보면 3월부터 5월말까지 지속된 만세운동은 전국 211개부 군에서 집회 1,542회, 2,023,089명이 참가해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검거 52,770명, 화재피해는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로 기록됐다. 이 기록이 최소한의 수치임을 감안한다면 실제로 더 많은 참여와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석

108) 『독립유공자 공훈록』 11, 국가보훈처, p.214.
109) 『평택시항일독립운동사』,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4, p.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