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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지역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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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만세운동지(현 진위면사무소 앞)

| 북면 만세운동지(현 진위면사무소 앞) |



지역별 3·1 만세운동 현황


● 북면(현재의 진위면)


3월 11일 봉남리에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월 18일 진위 읍내에서는 보통학교 학생 20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월 21일 천도교구가 있고 천도교인이 많은 북면 야막리 주민들이 봉남리 주민과 합세해 500명의 시위대를 이루어 태극기를 들고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면장을 앞 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110) 경찰 과 수비대가 출동해 해산시키고 주모 자 박창훈朴昌勳을 체포했다.
3월 31일 북면 면소재지인 봉남리 에서 500여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마을 박성백朴成伯(30세, 농업)·최 구홍崔九弘(22세, 농업)·유동환柳東煥 (24세, 농업)·전영록全榮祿(20세, 농 업) 등은 미리 태극기 30개를 만들어 준비했다가 3월 31일 오후 4시경 봉남리 주민 500여 명과 함께 북면사무소 앞과 경찰관 주재소 앞을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부르고 오후 6시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위로 박성백·최구홍·유동환·전영록은 징역 1년, 유만수·김봉희는 태장笞杖 90대의 형을 받았다.
한편, 4월 1일 은산리에 사는 정경순鄭庚淳(24세, 농업)은 정문학鄭文學·정재운鄭在雲 등 3명의 동지들에게 “나가서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방화를 당한다”, “다른 곳에서도 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우리들도 부르자”고 권유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주민 30여 명이 은산리 산 위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에 많은 주민들이 호응해 산 아래에 모여 함 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최선유崔善有(32세, 농업)·정성숙鄭聖淑 등이 “봉남리 순사주 재소로 가서 만세를 외치자!”고 권유·선동했고, 시위 군중은 이에 호응해 면소재지인 봉 남리로 만세를 부르며 나아가 순사주재소 앞에서 최선유 등이 선창하고 군중이 호응해 독 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정경순·최선유는 각각 일경에 체포되고 재판에서 징역 6월 이 확정돼 복역했다.



● 서탄면


4월 2일 서탄면장 윤기선尹箕善은 면서기 한성수韓聖洙에게 각 구장들에게 당일 오전 10 시까지 주민들을 인솔해 서탄면사무소 앞에 모이게 했고, 윤기선은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 키라. 만일 불참하면 뒤에 큰 환患이 있으리라”는 격문을 작성해 각 구장들에게 보냈다.
4월 3일 정오경 서탄면사무소 앞에 4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였고, 윤기선 면장은 “세계의 대세로 보면 조선은 독립할 시기에 이르렀다. 다 같이 경하할 일이며 복 받을 일이다. 이번에 내가 적에게 잡혀가는 일이 있으면 면민 전체를 벌주는 일이니 계속 투쟁하라”는 취지의 연설을 한 후 선두에 서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니 윤교영尹敎永과 윤대선尹大善을 비롯해 많은 주민들이 호응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윤교영은 격문을 돌리는 책임을 맡아 열성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특히 윤대선은 “우리나라가 독립하면 왜놈이 가지고 있는 모든 토지는 전부 몰수하고 동시에 왜놈은 우리나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격려하며 만세운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111)
4월 10일 금암리에서 100여 명(일본 기록에는 40명)이 뒷산에 모여 봉화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회화리에 있는 주재소를 습격하고 만세를 부르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경찰이 출동하자 시위대는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폭행했고, 일본 경찰은 발포하면서 해산을 강요해 1명이 죽고 3명이 부상했으며 5명이 체포됐다. 그밖에 사리·수월암리에서도 만세를 부르다가 자진해산했다. 특히 회화리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의 영수領袖(준장로급) 차덕겸車德兼은 만세운동에 가담해 항상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 송탄면


4월 1일 송탄면 지산리의 보통학교 학생 이약우李若雨는 독립선언서를 돌리며 병남면 지역의 만세운동을 알렸다. 4월 2일 독곡리에서 평화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도 폭력 시위가 잇달아 부상자가 발생했다.



● 고덕면


3월 23일 일본 경찰은 두릉리에 거주하는 임승팔林承八·고재문高在文·이승기李承基·김유경金有卿을 구금하고 안재홍과 이병헌과의 접촉관계를 자백받기 위해 고문했다.
1월경 고재문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108원을 서정리에서 이병헌李炳憲에게 건네 준 것이 발각돼 심한 고문을 당했다. 증인으로 출두한 이병헌은 그 돈은 독립운동 자금이 아닌 천도교당 건축비 명목으로 받은 것이라며 준비해 온 영수증을 제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4월 1일 율포리에서는 500여 명의 농민들이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날 밤 9시경 평택역 광장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산봉우리마다 횃불시위가 전개되자 고덕면민들도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날 밤 일본 경찰이 안재홍의 집을 수색하자 주민들이 격분해 만세를 부르며 반항했다. 이날의 만세운동으로 4월 9일 일본 경관대는 병정 8명, 자위단원 8명과 함께 주모자 검거를 위해 출동했다가 돌아가던 중 군중들이 만세를 불렀고 이에 발포해 6∼7명이 죽고 70여 명이 부상당했다.112)



평택역 만세운동지(현 원평동)

| 평택역 만세운동지(현 원평동) |


● 병남면(현 평택역 주변)


3월 11일 아침에 만세를 부르자는 격 문이 평택정거장 앞에 붙어 경찰이 비 상경계를 하던 중 오후 5시경 평택역 앞 사거리에서 수천 명이 만세를 부르 며 군문리 다리로 행진했다.
이 운동은 비전리에서 미곡상을 하던 이도상李道相이 주도했다. 그는 동창생 인 안충수安忠洙에게 서울을 비롯한 전 국 각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 고 목준상睦俊相(29세)·심헌섭沈憲燮(32세, 농업)·한영수韓泳洙(28세, 농업)·민응환·안 종악·안봉수 등과 3월 10일 안충수의 집에서 모여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도상은 3월 10일 밤, 친동생 이덕상李德相에게 가사를 맡기면서 “내일이 평택 장날이므 로 그곳에 가서 동지들과 조선 독립을 외칠 작정이다. 곧바로 체포될 것이므로 다시 집에 오지 못할 것이니 늙은 어머니를 잘 봉양하라”는 말을 남기고 이튿날 역전에서 장날에 모 인 군중들을 선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31일 조선인 상점 2개소에 대해 평택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편으로 협박장이 전달됐 다. 읍내의 각 상점들은 4월 1일을 기해 모두 폐점해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일제는 상인 10여 명을 군청에 불러 군수와 경찰이 함께 개점을 강요했으나 모두 후환이 두렵다는 이유 로 완강히 거부하고 상점 문을 열지 않았다.
4월 1일 밤 평택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밤 10시 반경 평택일대에 무수한 봉 화를 올리고 시작된 이날의 만세운동은 3,000명의 군중이 평택에 쇄도해 새벽 2시까지 만 세운동을 벌였다. 이때 경기도 장관(현재 도지사)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4월 1일 오후 10시반경부터 평택 시가를 중심으로 하여 10리 내외의 곳인 서남 부용리에 걸쳐 무수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10여 개 집단 인원 약 3,000여 명이 평택에 쇄도해 정세가 불온하므로 해산을 명하였던 바 저항하고 쉽게 해산하지 않으므로 발포해 오전 2시경 일단 진정했다. 폭도들은 사망자 1명, 부상자 4명 외에 경상자가 있는 모양임.


이날 밤 10시경 평택역으로부터 약 10정 되는 곳에서 소요를 시작했고 산봉우리마다 횃불시위로써 호응했다. 일경이 발포해 사망자 4명, 중상자 1명, 경상자 10여 명이 발생했다.113)
4월 7일 평택에서는 이도상의 지도로 장꾼들을 선동해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4월 11일 오후에도 평택역 앞 사거리에서 수십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경찰이 출동해 주모자 7명을 체포했다.
평택역은 평택 3·1 만세운동의 상징성을 가진다. 철도를 통해 신속한 정보전달과 이동이 가능해지고 만세운동 역량이 집중됐다.



● 오성면


3월 10일 오성면에서는 평야와 산간지대까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길음리·죽리·교포리 면민들이 숙성리 뒷산에 모여 만세를 불렀고 청북면 옥길리 마루산과 신포장터에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4월 3일 밤 오성면 학현리에서는 이 마을 봉오산 위에 주민들이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학현리 서당 한문교사인 김용성金容成(26세)과 공재록孔在祿(25세, 농업)·이사필李思弼(농업)은 12∼13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짚을 쌓아 봉화를 올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용성은 징역 1년, 공재록과 이사필은 각각 1년 6월형을 받았다.



● 부용면(현 팽성읍 지역)


4월 1일 밤 평택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팽성(서면, 부용면)에서도 군중이 무리지어 옛 관아 뒷산에 불을 놓고 평택역으로 향하던 중 안성천 다리 부근에서 소요騷擾를 시작해 병남면·송탄면·고덕면까지 확대됐다.



● 청북면


3월 10일 청북면 토진리 뒷산인 오봉산·옥길리·마루산(현재 무성산)·신포장터에서 군중이 집합해 만세를 불렀다. 이날이 장날이라 많은 장사꾼들이 참여해 더 욱 격렬했다.
4월 1일 면민 수십 명이 동리에서 만 세를 부르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오성면 안화리 안육만安六萬(20세, 농 업)은 김원근金元根과 함께 백봉리 큰 길에서 “이 동리에서는 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빨리 나와서 부르라” 고 촉구하자 오성면 안화리 최만화崔 晩華·안희문安喜文·황순태黃順泰·정 수만鄭水萬·홍기성洪奇成 등 수십 명이 호응해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 위를 벌였다. 안육만은 징역 1년, 최만 화·안희문·황순태·정수만·홍기성 등은 각각 6월형을 받았다.



● 포승면


3월 10일 청북면 마루산 위에서 점화 된 봉화시위를 신호로 희곡리 대덕산 에서 주민 200여 명이 모여 이민백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평택지역 3·1 만세운동이 처음으로 전개된 현덕면 기산리 옥녀봉과 송산들(2013)

| 평택지역 3·1 만세운동이 처음으로 전개된 현덕면 기산리 옥녀봉과 송산들(2013) |


평택 3·1 만세운동 최초 발생지 기념탑 제막식(현덕면 권관리 2012.3.9)

| 평택 3·1 만세운동 최초 발생지 기념탑 제막식(현덕면 권관리 2012.3.9) |


평택지역 3·1 만세운동 봉기도

| 평택지역 3·1 만세운동 봉기도 |


● 현덕면


3월 10일 청북면 마루산 위에서 점화 된 봉화시위를 신호로 희곡리 대덕산 에서 주민 200여 명이 모여 이민백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3월 22일 현덕면 권관리에 천도교도들이 움직일 기세가 보인다는 정보를 접한 일본 경찰은 이곳 천도교도들 중 이민도李敏道·이승엽李承燁·최혁래崔赫來·장용준張容俊·이인수李麟秀·최경환崔京煥·이민익李敏益·최정래崔貞來·최경섭崔慶燮·최이래崔利來·최우섭崔虞燮·최종환崔鍾煥 등 12명을 평택경찰서에 가두고 고문했다. 그 가운데 이민도는 아들이 천도교 중앙본부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석방됐다.


[평택지역 일자별 3·1 만세운동 현황] 114)


일시 장소 인원 시위상황
3. 9 현덕면 기산리·황산리
도대리·방축리
각 리 주민
주민들이 면사무소 뒷산인 옥녀봉에서 횃불을 켜들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름
3. 10 서탄면 금암리 40명
서탄면 금암리 주민 40여 명이 주재소 습격
3. 10 오성면 길음리
죽리·교포리
각 리 주민
주민들이 숙성리 뒷산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름
3. 10 청북면 토진리 다수 군중
군중들이 토진리 뒷산에 모여 오봉산과 마루산
신포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
3. 10 포승면 희곡리 200명
이민백의 주도로 희곡리 대덕산에 주민 200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함
3. 11 평택역 앞 사거리 수천 명
이도상·목준상·심헌섭·한영수 등이 조선 만세운동
을 전개함
3. 18 진위면 20명
진위읍내에서 보통학교 학생 20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함
3. 21 북면 야막리 봉남리 500명
야막리 천도교인과 봉남리의 유림들이 합세해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면장을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함
3. 22 현덕면 권관리 주민
천도교 이민도 외 12명이 평택경찰서에 구금, 고문당함
3. 23 고덕면 두릉리 주민
임승팔·고문재·이승기·김윤경 등이 안재홍과 접촉
및 독립운동 자금문제로 고문당함
3. 31 북면 봉남리 400명
주민 박성백·최구홍·유동환·전영록 등이 만세운동
을 주도해 북면사무소·경찰관 주재소 및 각 동리를
돌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함
4. 1 북면 은산리 30여명
정경순의 주도 하에 은산리 산 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최선유·정성숙의 선동으로 면소재지인
봉남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침
4. 1 송탄면 지산리 주민
보통학교 학생 이약우가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함
4. 1 고덕면 율포리 500명
율포리 농민 500여 명이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함
4. 1 평택역 앞 3,000명
3,000명의 주민들이 새벽 2시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함
4. 1 팽성 주민
주민들이 부용산에 모여 횃불 봉화를 올려 만세운동을
전개함
4. 1 청북 수십 명
안육만·최만화·안희문·황순태·정수만·황기성
등이 주동돼 만세운동을 전개함
4. 2 고덕면 두릉리 주민
일제가 안재홍의 집을 수색하자 주민들이 반발함
4. 3 서탄면사무소 앞 400명
서탄면장 윤기선·윤교영·윤대선 등이 주동돼
만세운동을 주도함
4. 3 오성면 학현리 2∼13명
김용성·공재록·이사필 등의 주동으로 봉오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려 만세운동을 전개함
4. 7 평택 수천 명
이도상의 지도로 장꾼들을 선동해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됨
4. 10 서탄면 금암리 100명
주민들이 뒷산에 모여 봉화를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함


● 평택시 죽백동으로 편입된 지역(구. 안성시 원곡면)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현 평택시 죽백동) 주민들은 일제 강점 이후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와 경제적 수탈을 경험했다. 4월 1일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31세, 원곡면 외가천리, 대서업)·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이덕순李德順 등이 주동이 돼 안 성군 양성·원곡면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주동자들은 전날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각 동리에 연락을 취해 동조자들을 규합했다. 독립선언서를 등사하 고 태극기 수백 장을 만들어 놓았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최초 양성면과 원곡면이 별도로 전개됐다. 1,000여 명의 원곡면 시위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서 이유석이 “이제부터 면장을 끌어내어 태극기를 주어 선두에 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주재소로 가자”는 제안에 따라 면장 남길우와 면서기 정종두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양성면 쪽으로 행진했다. 시위대가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고개(현재 만세고개)에 이르자 최은식·홍창섭·이유석 등이 번갈아 연설을 했다. 최은식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적의 기반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이때를 기회로 일어나자”고 연설했다. 이유석은 “조선은 독립을 선포했으니 여러분은 양성경찰 주재소에 이르거든 일본인 군사들과 같이 만세를 부르고 이에 응하지 않은 때에는 자기로서 할 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주동자들이 교대로 일어나 일본정책의 시행관청이 필요없음을 말하고 양성과 원곡면의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 및 일본인 거류자들을 몰아내고자 했으며 돌과 몽둥이를 준비하자고 했다. 이에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질서 있게 시위행진을 전개했다.
시위대는 양성면에 있는 순사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 등을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1,000여 명의 원곡면 시위대와 해산해 돌아가던 양성면민들도 합세해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10시경 2,000여 명의 시위대는 양성 순사주재소 앞에 도착했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양성 우편소로 가서 우편소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하고 방화했다. 일본인 잡화상 외리여수外里與手의 점포와 고리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도 습격해 파괴했다. 양성면사무소에 침입해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시위 군중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날 4월 2일 오전 4시경 주민들은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를 습격해 사무실 1동과 공용서류 및 물품을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115)
시위대는 4월 2일 아침 송탄면 칠원리를 지나 7km 서남방의 경부선 철도의 침목을 뽑아 열차를 차단하려 했으나 일제의 수비대가 온다는 소식에 모두 피신했다. 시위대 일부는 일제 수비대의 진압을 지연시키려고 안성과 양성간의 안성천 큰다리를 끊어버렸다. 일제 수비대의 진압이 지연되고 주민들은 무사히 피신해 4월 2일부터 시작된 일제의 주동자 체포에 주민들의 피해가 최소화됐다.
평택·화성·안성 지역의 극렬한 시위는 시위진압을 위해 군대동원을 지시하고 경기도에서는 가장 극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한 이 지역에 4개 파로 나누어 검거반을 파견했다.
6월 1일 3번째로 36명의 군 병력을 동원해 경찰과 함께 검색을 실시해 이희권과 이양섭만 이 체포되고 주동인물인 최은식·이덕순·이근수·이유석·홍창섭 등은 검거를 피했으나 나중에 최은식은 주민 신고로 체포당하고 말았다.
이 일로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燒燬·소요騷 擾혐의로 기소돼 각각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양성·원곡면의 인명과 재 산의 손실은 다음과 같다.


[양성·원곡면의 인명 및 재산 피해현황] 116)

현장순국 3명 피검자 361명
부상순국 7명 옥고 127명
안성경찰서 순국 5명 방화·소실 9동
서대문형무소 순국 9명    

안성군 원곡면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한 평택시 죽백동 거주자는 다음과 같다.


성명 異名 연령 주소 형량 서훈
김시연(金時然) 致三 57 죽백리 67 3년 건국훈장애족장
김창섭(金昌燮) 明集 38 죽백리 2년  
박옥동(朴玉童)   20 죽백리 74 2년 건국훈장애족장
박용업(朴龍業) 元西 27 죽백리 68 3년  
박정식(朴正武)   40 월곡리 2년 6월 건국훈장애족장
서병돈(徐炳敦) 炳勳 29 죽백리 76 1년 3월  
서완득(徐完得) 鳳五 35 죽백리 1년 3월  
이규창(李奎昌)   21 죽백리 51 3년 건국훈장애족장
이상신(李相信)   33 죽백리 86 7년 건국훈장애족장
이양섭(李陽燮) 明汝 40 죽백리 64 10년(옥중순국) 건국훈장국민장
이영우(李英雨) 建和 18 죽백리 74 1년 3월 건국훈장애족장
이종만(李鍾萬) 文明 38 월곡리 3년 건국훈장애국장
정호근(鄭鎬根) 來順 31 죽백리 76 3년  
홍승보(洪承甫)     죽백리 내촌 현장순국  
이호익(李鎬益) 萬福 23 죽백리 1년 3월 건국훈장애국장


피해상황


일제는 만세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평택지역 3·1 만세운동 일자별 일제 대응과 인명 피해현황] 117)


번호 일시 장소 인명 피해현황
1 3.9 현덕면 옥녀봉
안중에 배치된 일제의 수비대가 출동해 총을 난사, 주민 중 일부가
부상하고 체포됨.
2 3.10 청북면사무소앞
일제 경찰이 기습해 시위대 중 사망·부상·체포자가 발생함.
3 3.10 서탄면 금암리
주민 40여 명이 주재소를 습격하자 일제가 발포해 주민들 중에서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함.
4 3.11 평택역 앞 사거리
수천 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 중 주동자 13명이 체포
됨. 이도상 징역 1년, 목준상·심현섭·한영수 각각 징역 8월.
5 3.21 북면 야막리·봉남리
일제는 경찰과 수비대를 자동차로 출동시켜 주민들을 해산시키고
시위주동자 박창훈을 체포함.
6 3.31 북면 봉남리
만세운동 주동자 박성백·최구홍·유동환·전영록 징역 1년,
유만수·김봉희 태 90대.
7 4.1 북면 은산리
정경순·최선유 각각 징역 1년, 60~70명 연행
8 4.1 고덕면·진위면·탄현
주민 수천 명 평택·수원간 큰 길에서 만세운동 중 일제의
발포로 즉사자와 부상자 속출. 사망자 고덕면민 9명,
평택읍민 5명, 서탄면민 4명, 부상자 60~70명.
9 4.1 부용면
일제의 발포로 2명 사망, 4명 부상함.
10 4.1 청북면
안육만 징역 1년, 최만화·안희문·황순태·정순만·홍기성
각각 징역 6월.
11 4.1 부용면 부용산
일제 군경의 무차별 사격
12 4.2 송탄면 독곡리
주민 500명이 평화적 만세운동을 전개함. 이때 일제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고 6~7명이 부상함.
13 4.2 고덕면 두릉리
일제가 안재홍 가택을 수색하자 주민들이 반발. 이때 일제가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해 6~7명이 부상함.
14 4.2 오성면
오성면민 1,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함.
이에 일제가 11명을 체포함.
15 4.3 오성면 학현리
김용성 징역 1년, 공재록·이사필은 각각 징역 1년 6월.
16 4.9 고덕면
오후 8시 일경과 자경단원 8명이 만세운동 주동자를 검거하기
위해 출동하자, 주민들이 반발해 만세운동을 전개함.
이에 일경이 발포해 주민 6~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함.
17 4,10 서탄면 금암리
주민 1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일제 경찰이 발포해
주민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으며 5명이 체포됨.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전국 군별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 통계(1919.3.1 ~1919.5.말)에 평택·진위의 만세운동현황을 살펴보면 집회 15회, 참여인원 5,800여 명, 사망 64명, 부상 174명, 체포 257명으로 기록돼 있다.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과 비교해도 상당히 활발한 것이다. 4월 10일 이후 평택에는 육군 보병 1개 중대를 배치해 계속 주둔 시켰으며118) 각 군마다 자위대를 조직했는데 평택 역시 조직됐다.119)



평택지역 3·1 만세운동의 주동인물


평택지역의 조선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의 나이·주소·직업·선고형량·공훈사항은 다음과 같다.


[평택지역 3·1 만세운동 주동자] 120)


번호 성명 주소 나이 직업 선고형량 공훈사항
1 김용성 오성면 학현리 26 한문교사 징역1년
1990 건국훈장  애족장
2 공재록 오성면 학현리 25 농업 징역1년
1990 건국훈장  애족장
3 이사필 오성면 학현리 31 농업 징역1년6월
1990 건국훈장  애족장
4 이도상 병남면 비전리 30 미곡상 징역1년  
5 목준상 병남면 합정리 29 미곡상 징역8월 1998 대통령표창
6 심헌섭 병남면 비전리 32 농업 징역8월  
7 한영수 오성면 양교리 28 농업 징역8월 2006 건국포장
8 정경순 북면 은산리 24 농업 징역6월 2000 대통령표창
9 최선유 북면 은산리 32 농업 징역6월  
10 이봉순 진위군 22 학생 태형90  
11 이규선 북면 봉남리 25 농업 징역1년8월
2006 건국훈장 애족장
12 최만화 오성면 안화리 24 농업 징역6월  
13 안육만 오성면 안화리 20 농업 징역1년 1983 대통령표창
1990 건국훈장  애족장
14 안희문 오성면 안화리 21 농업 징역6월 1992 대통령표창
15 황순태 오성면 안화리 31 농업 징역6월  
16 정수만 청북면 백봉리 20 농업 징역6월  
17 홍기성 청북면 백봉리 36 농업 징역6월  
18 박성백 북면 봉남리 30 농업 징역1년  
19 최구홍 북면 봉남리 22 농업 징역1년
2004 건국훈장 애족장
20 유동환 북면 봉남리 24 농업 징역1년
1994 건국훈장 애족장
21 전영록 북면 봉남리 20 농업 징역1년  
22 유만수 북면 봉남리 26 농업 태형90  
23 김봉희 북면 봉남리 29 농업 태형90 2005 대통령표창
24 이익종 고덕면 율포리 23 학생 징역10월 1995 건국포장
25 이덕순 병남면 율성리 41 농업 1차)징역7년
2차)징역6월
1977 대통령표창
1990 건국훈장  애족장
26 이승익 송탄면 모곡리 33 농업 징역 2년 1980 대통령표창
1990 건국훈장  애족장
27 윤기선 서탄면 사리 53 서탄면장    
28 한성수 서탄면   면서기    
29 윤교영 서탄면   농업    
30 윤대선 서탄면   한문교사    
31 이민백 포승면 희곡리   농업    
32 이약우 송탄면 송북동 17 학생    
33 이병헌 현덕면 권관리 23 학생   1993 건국훈장 애족장
34 이명천 진위면 봉남리   농업    
35 원제승 송탄면 도일리   농업    
36 최종화 안중면   학생    


평택 지역 3·1 운동의 특징


평택의 3·1 만세운동은 초기에는 일부 지식인과 종교 단체에 의해 주도됐으나 3월말 4 월초의 운동은 농민들이 주체가 되면서 참여자가 크게 확대되고 능력도 고양됐다. 초기 평 택의 운동을 전반적으로 주도해나간 것은 향촌사회 내의 지식인 청년 학생들로 비폭력주 의에 입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운동 초기단계에서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 유포된 선언서·태극기·독립만세기를 제작 배포하며 직접 만세운동을 이끌어가는 선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에는 농민과 상인이 주도해갔다. 또한 3월 초부터 시작된 평택의 3·1 운동은 3월 22일 서울에서 대중들의 만세운동이 전개된 이후 큰 영향을 받아 3월말과 4월초에 집중되고 가장 격렬하게 진행됐다. 전개과정이 안성·용인 등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3·1 운동이 지역 간에 유기적인 연관 속에 진행됐음을 알려주고 있다. 평택의 3·1 만세운동 특징은 우선 지리적인 특징이 있다. 만세운동의 장소는 구릉이나 평야지대에서 전개됐는데 효과적인 군중동원과 연대감 강화와 단결력을 위해 횃불을 이용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산업적인 특징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 서울과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이로 인해 만세운동이 서울의 영향을 받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평택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이 경부선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만세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철도는 상업의 발달과 도시화를 가속화시켜 상인층의 성장과 병남면의 경우처럼 상인주도의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인근지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4월 중순 이후 평택에는 만세운동을 감시하고 억압하기 위해 육군 보병 1개 중대를 배치했다. 평택·화성·안성지역의 만세운동은 다발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으며 주재소나 관공서를 습격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주둔하게 됐고, 화성의 경우 잔인한 보복 학살이 제암리교회(4월 15일)에서 발생했다.



주석

110) 『평택 3·1 독립운동사』, 평택시, 1997, p.142.
111)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171~172.
112) 『매일신보』 1919년 4월 14일자.
113) 『매일신보』 1919년 4월 5일자.
114)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184.
115) 『독립운동사자료집』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pp.422~482.
116) 윤후, 『원곡·양성의 3.1운동』, 1986, p25.
117)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188.
118) 『매일신보』 1919년 4월 19일자.
119) 『매일신보』 1919년 5월 5일자.
120) 평택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189~190.